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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고개 지키는 벅수 한쌍, 신혼살림기통제영을 창건한 사적을 기록한 ‘두룡포기사비’는 통제영이 생기기 전의 통영 두룡포를 “한낱 소금기가 많아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바닷가 항구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우거진 언덕”이라고 적고 있다.이 시절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던 사람들은 원문 아래의 해안에서 나룻배로 북신만을 건너 명정동 고갯길을 통해 옛 두룡포로 왕래했었다.언덕 중간쯤에 이르면 산꼭대기로 가는 길과 두룡포 마을 가는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 갈림길에 의좋은 벅수 한 쌍이 서 있었다.언제 누가 세운 것인지는 알 수 없
동네이야기
김선정 기자
2018.11.27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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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동의 자랑이순신 사당의 적통(嫡統), 통영충렬사1864년, 지방의 유림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전국의 서원을 국가에 귀속시켜라!”흥선대원군이 무너진 왕권을 바로세우기 위해 지방 권력의 중심지였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이와 함께 서원이 관리하던 사당도 대대적인 정리에 들어갔다.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 서원만 남을 만큼 서슬 퍼런 숙청이 감행될 때, 사당 정리에는 ‘1위인 1사당’의 원칙이 적용됐다.당시 이순신 사당은 통영뿐 아니라 여수, 아산, 남해, 정읍 등 전국에 21곳이나 있었다.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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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1.2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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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피랑의 부활“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동네 1위, 명정동”경남도 내 건강지수를 측정한 지표조사 결과, 명정동의 위기는 심각했다.소득, 건강, 술 등 각종 건강지표를 나타내는 설문조사결과 명정동이 술소비 1등, 기대수명 꼴찌라는 성적을 보였던 것. 특히 더 걱정스러운 건 자살 위험율이 타지역보다 5배나 높다는 점이었다.이런 이유로 명정동은 건강취약지역 주민 건강 증진을 위한‘건강플러스 행복플러스 사업’ 대상자가 되어, 통영시에서 가장 먼저 ‘건강위원회’가 설치됐다. 2012년의 일이다.표준화 사망률이 높은 지역을 대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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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1.26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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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성지, 명정동조선 후기 명정동은 성지와 같았다.‘이순신의 사당 충렬사’의 위상은 삼도수군통제영과 함께 통영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남았다.충렬사 앞으로는 사체나 상여의 진입이 금지되었다. 더구나 충렬사 앞 두 개의 우물인 일정(日丼)과 월정(月丼)은 연중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었는데, 사체가 그리로 지나가면 물이 흐려졌다 한다.명정동의 어원도 이 일정(日丼)과 월정(月丼)의 ‘일월(日月)’을 합쳐 명정(明丼)이라고 이른 말에서 생겨났다.이 명정샘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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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1.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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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에서 서쪽을 나가면 안뒤산 기슭으로부터 그 아래 일대는 간창골이란 마을이다.간창골 건너편에는 한량들이 노는 활터가 있고, 이월 풍신제를 올리는 뚝지가 있다. 그러니까 안뒤산과 뚝지 사이의 계곡이 간창골인 셈이다.간창골에서 얼마를 가파롭게 올라가면 서문이 있다.그곳을 일컬어 서문고개라 한다.서문 밖에는 안뒤산의 한 줄기인 뒷당산이 있는데, 그 뒷당산 우거진 대숲 앞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 충렬사가 자리잡고 있다.이 일대는 이곳의 성지라 할 만한 지역이다.충렬사에 이르는 길 양켠에는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줄을 지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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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1.2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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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도천동•••섬과 육지를 잇다“식민지 백성이 감히 조상의 원혼을 밟게 둘 수 없다.”동양 최초로 생긴 해저터널인 통영해저터널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조상들의 시신이 산을 이루었던 송장나루 위로 다리를 둘 수 없다며 해저터널을 팠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저터널이 있는 당동 앞 해협은 ‘송장나루’라 불렸다.일명 ‘송장나리끝’, ‘송장낭끝’, ‘송장끝’ 등으로 불린 이곳 나루터에는 예부터 갈바람(서풍)이 심하게 부는 겨울철이면 송장(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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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1.0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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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천동•••초가사당에 모신 첫 제사“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셨다!”장군을 하늘처럼 따르던 수군들과 백성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일본 수군은 전쟁을 끝내고 돌아갈 테니 돌아갈 길을 내어달라 했고, 전쟁에 지친 조선의 조정에서는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편입하라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기어이 명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섬멸했고, 노량바다에서 순국하고 말았다.전쟁이 끝난 기쁨도 장군을 잃은 슬픔을 상쇄하지 못했다.이듬해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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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1.0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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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동은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첫 번째 사당인 착량묘와드높은 학문으로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고시완 선생의 백운서재,하늘이 감동한 효자 박지순 공이 있어,충신과 스승과 효자가 나란히 뿌리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동양최초의 해저터널과 통영운하를 통해 해양수산의 길목이 되고,윤이상기념관을 통해 현대음악의 중심이 된 곳이기도 하다.현재 행정구역 도천동은 우럭개마을의 평림1동과 한실마을의 인평1동, 민점마을의 인평2동, 당동, 도천동 등 5개 동을 합해 놓아, 통영시 동지역 중에 가장 면적이 크다. 도리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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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1.08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