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본 사랑 순애보, <통영> 명시 낳아


 통영 출신 이화여고생 박경련에 반해 세번이나 통영 방문
 한번 본 사랑 순애보, <통영> 명시 낳아

▲ 남행시초를 쓴 백석 시인과 통영 여인 박경련

산 너머로 가는 길 돌담각에 갸웃하는 처녀의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 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 같은데...(중략) 
                                               - 백석 시인의 <통영-남행시초> 중에서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재시인 백석.

1936년 1월 총33편의 작품울 묶어 만든 시집 <사슴>을 간행해 이틀만에 매진됐다. 그의 출현은 조지훈, 김소월, 윤동주 등 한국문학사의 주류를 이룬 시인들의 반열에 올려 평가하고 있다.
통영 곳곳에 벚꽃이 만발한 4월은 올해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을 뒤로 하고 봄을 알리고 있지만, 백석 시인에게 통영의 4월은 잔인한 달 이었다.
 

▲ 백석 시비, 통영 충렬사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충렬사 맞은 편 백석 시비>

평북 정주가 고향인 백석이 통영을 세 번이나 다녀간 것은 다름 아닌 통영 출신의 이화여고생 박경련이 있었다.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영문학을 마치고,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여성>지에 입사해 편집일을 하고 있을 때인 1936년 3월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서 만난 통영 출신 이화여고생 박경련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백석은, 조선일보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 신현중이 소개했다는 말도 있고 신현중을 따라왔다가 우연히 보게 됐다는 설도 있는데, 정확치는 않다.
여하튼 이러한 인연으로 알게 된 박경련 때문에 세 번이나 통영을 방문했지만,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혹자는 박경련의 어머니를 직접 찾아가 청혼을 요청했다는 얘기도 있고, 친구를 통해 청혼을 요청했다는 설도 있다. 어찌됐건 청혼은 어머니에게 전달된 듯 하다. 박경련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에게 백석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서상호는 통영출신의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영향을 받았는지 신현중 역시 독립투쟁을 해 통영으로 내려온 후에도 일경으로부터 요주의 인물이 됐다.
신현중은 서상호씨에게 백석이 집안이 매우 가난하고, 기생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말도 전했으며, 자신이 어떠냐며 당위성을 피력했다 한다. 또한 신현중은 약혼한 사이였지만, 파혼해가면서 백석이 박경련을 만난 1년 후인 1937년 4월7일 박경련과 결혼해 버렸다. 백석은 당연히 충격을 받았다. "여우에 홀린 것 같다"며 못내 아쉬워하며 실의에 빠졌다.

백석이 청혼을 요청했지만, 박경련과 대화도 없었고, 별다른 인간관계 즉, 좋아하고 있다는 의사만 확인했을 뿐이어서 아무래도 평소 친분이 있는 신현중의 프로포즈를 거부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를 회상하는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의 한 부분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이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 없는 것을 생각한다

이에 앞서 그는 <바다>라는 시를 통해 애틋함을 전하고 있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중략)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바다> 중에서



▲ 통영 2 백석.

<명정동 충렬사 맞은편에 자리한 백석의 '통영2' 시비>

통영시 명정동 396번지.
신현중과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 박경련이 살았다는 이곳은 현재 폐가로 남아있다. 충렬사앞 백석의 시비<사진>만이 덩그러니 그의 아픈 사랑의 흔적을 엿보게 하고 있다.

지난 80년 고향인 진도에서 선장이 되겠다며, 완도로 향했고 그곳 교회에서 만난 초등학교 동창을 3년 동안 말한마디 못하고 일방적인 편지만을 보내며 나 홀로 짝사랑했던 나를 돌아보며 백석이 오버랩된다.

백석은 자신의 시집 <사슴>을 받아보고 답례로 시 <수선화>를 써준 신석정 시인에게 감사의 성격을 담은 산문이 조선일보 1936년 2월21일자에 실렸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되어 젊디 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중략)
총명한 내 친구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 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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