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 신비로운 매력의 마법

“카르멘은 바람 같은 여자야! 느낄 수는 있어도 잡을 수는 없지.”

형은 집에서 연극 연습을 했다. 대본을 들고 때로는 목청을 높였다가 때로는 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겨우 네 살 위였지만, 어린 영석은 형이 하는 일은 모두 멋져 보였다. 중학생 형이 대본을 들고 자기 역할, 남의 역할을 섞어 연습하는 것을 보고 동경했던 탓일까? 영석은 학교에서 연극할 사람을 모집할 때 손을 번쩍 들었다.

주인공 영감 역을 맡은 영석은 인생 첫 주연을 멋지게 해 냈다. 물론 그때는 나이 일흔이 된 오늘까지 연극인의 인생을 살게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 사랑받고있는 '사랑, 소리나다'

38년 동안 통영 연극 역사를 써오고 있는 극단 벅수골 장영석 고문(70)의 어린시절 이야기이다.

뜨거운 젊은이들의 만남 ‘독서회’

8남매의 맏이였던 형 장현은 형제들의 우상이자 스승이자 멘토였다. 둘째인 자신이 군대를 다녀와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 형은 야당이었던 신민당 선전부장이었다. 변변한 벌이가 없는 야당투사였지만, 한번도 가난한 형의 삶을 남루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형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았고 무조건 멋졌다.

그런 어느 날, ‘독서회’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이 젊은 영석을 찾아왔다.

“유치진 선생님의 희곡집을 갖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책을 읽고 토론을 하던 ‘독서회’ 회원들은 연극 공연을 하기로 결정하고 적당한 대본을 구하던 중이었다. 좁은 동네라, 서점 주인은 하나뿐이던 유치진 희곡집을 청년 장영석이 사갔다고 귀띔해 주었단다.

독서회 회원들은 이날 희곡집뿐 아니라 첫연극의 동지를 얻었다. 유치진 작 ‘통곡’을 공연하는데, 책주인이었던 장영석이 주연을 하고, 그 형인 장현이 이름없이 연출을 돕게 되었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의 일이다.

중앙시장 지하에 있는 이 소극장에서 벅수골 연극사가 씌어졌다.

통영 연극의 부활 ‘극단 벅수골’

연극을 할 당시 장영석 고문은 국내 최초 아가용품 전문회사였던 ‘아가방’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젊은 가장이었던 장영석 고문은 가게를 보는 틈틈이 독서회 회원들과 책을 읽고 다음 연극을 궁리했다. 첫공연 이후, 연극에 대한 갈증은 깊어만 갔다.

1980년에 들어선 새로운 군정은 언론을 차단하고 문화를 통제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 연극계는 전국적으로 신생극단이 창단되기도 하고 소극장이 늘어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일찍이 1927년에 유치진의 ‘토성회’로부터 신극운동을 주도했던 통영의 토양 때문이었을까? 통영의 젊은이들은 고속도로도 놓이지 않은 서울을 오가며 극단 창단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소극장 공연을 보러 서울도 숱하게 오갔지. 연극을 계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알아보기도 하고.”

장현, 장영석 형제는 사재를 털어 극단을 창단하기로 했다. 연극에 동참했던 젊은이들이 함께 창단 멤버가 되었다.

제법 장사가 잘되던 가게를 처분해 극단을 차릴 때, 새댁이었던 아내는 앞날을 걱정하며 반대했지만 장영석 고문은 가슴이 뛰었다. 1981년 3월 20일이었다.

창립공연 '토끼와 포수' 공연뒤. 앞줄 안경쓴 이가 연출을 맡은 고(故)장현 대표, 뒷줄 맨오른쪽이 장영석 고문

38년 연극 인생

창단 2개월 만에 봉래극장에서 공연한 창립공연 ‘토끼와 포수’는 대성공이었다. 하루 네 차례 공연마다 객석이 가득가득 찼다. 장영석 고문은 도맡아 주연을 했다. 이렇다 할 스폰서 없이 사재로 제작비를 감당하는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이 가슴을 뛰게 했다.

장영석 극본의 '야소골의 달빛'

서울에서 연출공부를 하고 돌아온 셋째 장창석(현 극단대표)까지 가난한 극단살림에 합류했다. 1986년엔 중앙시장 내에 소극장도 개관했다. 서울과 부산의 극단을 초청해 연극축제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점의 시간, 장영석 고문에게 나침반과도 같던 장현 대표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흔셋, 너무도 아까운 나이였다.

장영석 고문은 형의 뒤를 이어 극단 대표가 됐다. 때로는 연극협회 통영지부장을 맡기도 하고, 후진을 양성하기도 하고,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었다. 섬마을을 찾아가 시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설화를 채록해 함께 연극무대를 만들어내는 사이에 38년이 지났다. 지금껏 걸어온 장영석 고문의 인생길이 그대로 통영의 연극사가 되었다.

세포마을 처녀바위 설화를 극화한 장영석 극본의 '치마꽃'

통영 콘텐츠 개발하는 극작가 장영석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장영석 고문이 희곡을 쓰게 된 이유다.

“통영은 콘텐츠를 많이 갖고 있는 도시야. 통영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

장영석 고문은 통영 설화들을 채록해 희곡으로 옮겨 쓴다. 산양읍 세포마을 설화를 극화한 ‘나붓등’, 처녀바위 설화를 극화한 '치마꽃' 등은 이미 여러 차례 공연됐다.

요즘 장영석 고문은 올해 출간할 예정인 ‘통영시지’의 연극사 부분을 집필하고 있다. 몸으로 써왔던 연극사를 진짜 글로 옮기는 것이다. 뜨겁게 살아왔던 시절이 컴퓨터에 하나씩 올라앉는다.

‘벅수골’이라는 이름은 어찌 그리 잘 지었는가? 평생 통영과 극단을 지켜온 장영석 고문과 극단 식구들은 한자리에 우뚝 서서 말없이 마을을 지키는 벅수를 쏙 빼닮았다.

연극사를 집필하고 있는 장영석 고문
2016년에 공연한 장영석 극본의 '나붓등'
통영 가는개마을 전통설화를 소재로 만든 '쟁이마을 할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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