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에 다시 걷게 된 교육자의 길

통영진로교육센터 강성범 센터장은 오직 한 길 통영 교육에 몸담아 온 교육자다. 1979년 충렬여중 국어교사로 통영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한 뒤, 34년 동안 충렬여중과 여고의 교사, 교감, 교장을 지내고 2014년 8월 31일에 퇴임했다.

그사이 충렬여고는 상업계에서 인문계로 전환하며 격동의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명실상부 통영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땀과 정열을 쏟았던 뜨거운 날들이었다.

그리고 천상 교육자인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얼마 전에 개원한 ‘통영진로교육지원센터’의 센터장이 된 것이다.

새 현판 앞에서 각오를 다진다.

“메마른 환경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에게 쉽게 만지고 만들고 경험할 수 있는 센터가 생긴 것이 여간 기쁜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꿈을 지원하는 진로교육지원센터가 되겠습니다.”

강성범 센터장은 이제 한 학교를 넘어서, 통영 전체 학교 아이들의 꿈을 키워줄 비전을 품고 있다.

충렬여중 국어교사로 20여 년

일찌감치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강성범 선생은 교대를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과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 그에게 풍금은 넘지 못할 장벽이었다. 전과목을 다 가르쳐야 하는 초등학교의 특성상, 교사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풍금을 쳐야 했다.

풍금을 피해 온 곳이 사범대였고, 자신있던 국어, 수학, 과학 중에 선택한 것이 국어였다. 강성범 선생은 과학과 수학을 잘하는 국어선생이 됐다.

첫 발령지는 충렬여중이었다. 강성범 선생은 고향인 남해를 떠나 통영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21년 10개월 동안 중3 담임을 하면서 고교 입시의 전문가가 됐다.

학창시절 감기를 잘 앓고 몸이 허약한 편이어서, 밤늦게까지 아이들과 씨름하다보면 체력이 딸렸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정면으로 극복하는 강선생은 매일 공설운동장을 열다섯 바퀴씩 돌며 체력을 보강했다.

경남에서 네 번째, 가장 멋진 건물을 갖고 있는 진로교육지원센터

충렬여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다

2000년에 충렬여고는 상고에서 여고로 이름을 바꾸고 인문계 2학급을 모집했다. 그리고 강성범 선생은 2001년에 충렬여고로 자리를 옮겼다. 인문계 학생들을 위한 입시 전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3년 뒤 교감이 되어 2년, 충렬여고 5년은 입술이 부르트도록 뛰었던 시간이었다.

“학교가 인문계로서 터전을 잡아가는 시기였어요. 교사들과 한 마음이 돼서 정말 날마다 ‘아이들’만 생각했지요.”

교감으로 근무하는 2년 사이에 인문계 학급이 3학급으로 늘었다. 강성범 선생은 교사회의 때마다 충렬여고가 어떻게 하면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강조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벽이 있습니다. 그 벽을 극복하려면 남들보다 두세 배 노력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충렬여고는 많은 벽을 가지고 있었다. 학급 수가 적어 내신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외곽에 있어 교통이 불편했다. 그러기에 강선생은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학부모가 “우리 학교는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가르친다”고 느끼게 하는 것뿐.

아이들의 끼가 마음껏 발산되길.... 댄스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소강당에서.

오직 아이들만 생각하며 교감, 교장으로

1:1 과외를 하다시피 하여 입시지도를 하자, 학생들의 입시 성적이 나아졌다.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 입학하는 선배들이 생기면서, 강성범 교감은 선배들을 학교로 불렀다. 선생들의 백 마디 말보다 선배의 한 마디 공부 노하우가 더 좋은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선배들의 경험담에 학생들은 힘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던 강성범 교감은 “시골에서도 서울대 갈 수 있어요”라는 기사 제목을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서울대 총장이 어느 고교에서 특강을 한 것이다.

강교감은 당장 서울대로 전화를 했다. “우리도 지방에 있는 학교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정말 잘 가르쳐보려고 애쓰는 학교입니다. 우리 학교에도 와서 특강을 해주세요.”

이렇게 해서 서울대 진학담당교수가 직접 학교에 와 특강을 하게 됐다. 이 일로 충렬여고는 서울대 진학에 자신감을 얻었다.

이 일을 연결한 직후, 강성범 교감은 충렬여중 교장이 되었다. 이후 충렬여고는 전국 수석을 배출하며 지역 명문으로 떠올랐고, 올해는 서울대에 4명을 보내는 이변을 연출했다. 6학급밖에 없는 지방학교가 이루어낸 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다양한 꿈을 응원하며

8년간 충렬여중 교장을 지내고 충렬여고 교장을 끝으로 은퇴한 것이 2014년 8월이었다. 정년이 있기에 은퇴이지,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즐기는 강성범 교장은 잠시도 쉬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대체의학 관련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인생 2막, 새로운 교육의 시작

“몸이 약해서 스스로 지압법을 공부하고 생활 속에서 활용한 건 30~40년 됩니다. 그동안 틈틈이 대체의학 관련 책을 읽어왔는데, 퇴직한 다음에는 아예 본격적으로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했지요. 신기하게 물리나 의학서적은 하루종일 봐도 지겹지 않아요.”

강 선생은 통영시 노인대학에서 건강 특강을 해달라고 초청할 만큼 수준급의 의학지식을 갖게 됐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런 다양한 관심이 진로교육지원센터를 위해서는 참 맞춤한 일이다. 다양한 꿈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 응원해야 하니 말이다.

“되도록 많은 아이들이 이곳에서 만지고 만들고 체험하며 꿈을 갖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작은 시골학교를 명문으로 키워낸 강성범 선생이, 이제 통영 아이들 전체를 품고 힘찬 첫 발을 내디딘다.

아이들이 선호하는 새로운 직업 바리스타 교육을 위해 준비한 커피머신
신혼여행 간 딸에게 영상전화가 오자, 금세 함박웃음이 핀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한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