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안아준 사람들

윤슬이 반짝이는 통영 바다는 그림처럼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다. 새파란 하늘을 그대로 담고 깊디깊은 품으로 고요하게.... 한 시간째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바다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 수고했어. 잘했어.”

이규명(50) 씨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았다. 숨가쁘게 달려온 인생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잘나가는 교육회사의 경영본부장으로, 영재들을 키우는 학원의 원장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기만 했던 이규명 씨가 통영에 이사 오게 된 동기다.

“원래는 강릉에 가서 살고 싶었어요. 힘들 때마다 바다를 찾아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동해바다는 저에게 ‘힘내! 뛰어!’라고 말하더라고요. 내가 과연 잘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을 때, 정말 아무 계획 없이 통영에 쉬러왔었어요.”

같은 회사의 교육국장이던 아내 박미란 씨가 건강이 안 좋아진 것도 여행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통영바다로부터 위로를 받은 것이다. 통영바다는 ‘더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지 않고 그저 도닥여줬다.

이규명 씨 부부는 그날부터 통영에서 살 집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16년 1월, 서울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미수동 거북선호텔 뒤로 이사를 와 버렸다. 여기서 부부는 책방과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

기린책방지기 이규명 씨

책을 팔지 않는 기린책방

이규명 씨가 운영하는 기린책방은 이상한 가게다. 책방인데 책을 팔지 않는다. “느끼시는 가치만큼 책값을 내세요.” 하고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너무 좋은 책”이라며 읽던 헌책을 나누기도 한다. 영업을 위해 시간 맞춰 문을 여는 것도 아니다.

미술을 전공한 아내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공예품을 만들기도 하며 행복한 통영살림을 시작했다. 통영의 인문학 프로그램과 공예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통영의 역사문화를 배워나가기도 한다. 달리느라 바빴던 서울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이 하나씩 들어왔다. 부부는 통영을 배우고 곱씹고 누리며 살고 있다.

규명 씨 부부는 기린책방에서 ‘비폭력대화 연습모임’을 한다. 벌써 2년째를 맞고 있는 이 소모임은 ‘기린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올해 통영시지속발전가능재단에서 지원하는 성인동아리 모임에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 14명의 회원이 매주 수요일 오전과 일요일 저녁에 기린책방에서 삶을 나누며 행복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책을 팔지 않고 추천하는 기린책방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은 비폭력대화 운동

한국NVC센터에서 진행하는 비폭력대화 소모임은 인간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연민으로 나와 타인을 이해하자는 의사소통 프로그램이다. 나의 권리가 타인에게 폭력이 되는 일이 없도록, 정확하게 말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 나간다.

“비폭력대화는 나에게 오는 폭력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법을 배우면, 부부나 부자간에 있는 관계의 폭력, 나라 간에 있는 갈등의 폭력에 대해서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됩니다.”

최근 국제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NVC 활동가들은 실제로 민족의 대립이 첨예한 지역에서 긴장을 와해시키며 괄목할 만한 조정성과를 내놓고 있다. 비폭력대화(NVC)는 학교나 관공서에서 교육프로그램으로 운영하기도 하고, 교사교육 특강으로 자주 사용된다.

수요일과 일요일에 비폭력대화모임을 하고 있다.

기린이 사는 마을

“기린은 세상을 멀리보고 크게 본다고 합니다. 또한 몸의 먼 곳까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 척추동물 중에 가장 심장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폭력대화에서는 ‘연민의 말’을 ‘기린의 말’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먹잇감만 보고, 땅만 보고 사는 사람의 언어를 ‘자칼의 말’이라고 말한다. 비폭력대화에서는 상대방이 자칼의 언어로 말해 올 때 어떻게 기린의 언어로 대답하는 법을 배운다.

어떤 사람은 상대가 자칼의 언어로 말하는데 기린의 언어로 대답하면 손해 보지 않을까 걱정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니.

그러나 이규명 씨는 “화내지 않고 상대방의 폭력을 거부하는 당당한 자기표현법을 배우기 때문에 오히려 NVC는 적극적인 대화방법”이라고 말한다. 서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요즘 문제되고 있는 갑을관계도 해결할 수 있다고.

기린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기린마을’을 만드는 게 이규명 씨의 꿈이다. 기린마을에서는 말뿐 아니라 선물처럼 거저 주고받는 새로운 경제개념도 배운다. 돈보다 ‘필요’를 먼저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규명 씨는 NVC 지도자 과정을 수료한 전문가인데도 교육비 없이 소모임을 이끈다.

“통영 사람들이 통영 바다처럼 서로를 품어주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통영의 이 새식구들은 오늘도 바닷가 작은 책방에서 기린의 말로 사람을 안아준다. 통영바다가 그들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통영 RCE 교육장터에서 비폭력대화모임을 설명하고 있는 박미란 씨.
통영 RCE 교육장터에서 비폭력대화모임을 설명하고 있는 이규명 씨.

 

키워드

#N
저작권자 © 한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