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2막을 준비하는 김진열 씨.

바다에서 시작하는 인생2막

“통영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요. 섬이라면 더 좋고요.”

김진열 씨(59세)는 통영 귀어학교에서 새로운 인생 2막을 꿈꾸고 있다. 쳇바퀴 돌듯 틀 속에 갇힌 생활, 롤러코스터 같은 부침(浮沈) 속에 고단했던 삶은 이제 추억으로 족하다. 무엇이든 품어주는 깊푸른 바다 속에서, 바다가 주는 만큼 거두고 바다가 안아주는 만큼 안긴 채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

현대자동차에서 근무하면서 우리사주를 통해 제법 큰돈을 모았던 김진열 씨는 2억원을 투자해 버섯을 배양하는 배지를 수입했다가, 고스란히 200만원짜리 비료로 넘겼다. 붙박이 가구 사업으로 모은 큰돈은 코스닥에 투자해 휴지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98년부터 시작한 부산한양프라자의 가구점은 새로운 부를 주었지만, 또 그만큼의 에너지를 가져갔다.
사업이 잘 될 때는 너무 바빠서, 모두 털어버렸을 때는 다시 일어서려는 안간힘 속에서 쉼없이 달려온 시간들….
이제 김진열 씨는 지나간 모든 삶을 접고 통영귀어학교에서 인생2막을 향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경상대학교 졸업생인 김진열 씨는 두 번째 경상대학교에 입학했다.

5년 전 처음 들었던 말 ‘귀어’

김진열 씨가 귀어를 꿈꾸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이다. 진열 씨의 가구점은 한때 부산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점포였다. 2호점에 직접 수입까지 하며 지갑 속에 수표를 두둑히 채워 다녔지만, 그는 가족과 식사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 고단함 속에 지쳐 가고 있었다.

“가구점이라는 게 그래요. 출근은 느즈막히 할 수 있지만, 퇴근 또한 늦어요. 딸아이가 자랄 때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어요. 한 달에 두 번, 그것도 월요일에 쉬는데 그날은 아이가 학교에 가잖아요. 애가 쉬는 일요일엔 내가 출근하고.”
요즘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이 진열 씨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직접 해외에서 가구를 수입하면서 국내 직송 때와는 다른 어려움이 생겼다. 순환이 잘 되는 제품은 물량이 없었고, 안 되는 제품은 창고가 부족했다. 유지 관리비가 늘면서 사업이 어려워지고, 진상 고객을 만나 큰 실랑이를 두어 번 하게 됐을 때 TV 인간극장을 통해 ‘귀어’를 생각하게 됐다.

진열 씨는 가구점 문을 닫고, 통영의 한 섬에 살고 있는 귀어민을 만나러 무작정 여객선에 올랐다.

귀어학교 개교식.

섬에서 만난 섬

처음 진열 씨가 “뱃일을 배우겠다.”며 섬을 찾았을 때 섬은 낯선 이방인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뭐하러 왔는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했고 “여기서 일할 사람 같지 않다.”며 거리를 두기도 했다.

물메기 철을 맞아 섬이 가장 바쁜 시기에 돌입하는 11월, 석 달 동안 일당 일을 하기로 구두계약을 하고 진열 씨는 부산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약속한 날을 이틀 앞두고 전화가 왔다.

“참 미안스럽게 됐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방인을 맞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이장의 전화였다. 김진열 씨에게 섬사람들은 또 하나의 거칠고 척박한 섬이었다.

그리고 5년, 그사이 잠깐(5개월) 수산가공 공장의 관리과장을 맡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벌어놓은 것을 까먹으며 지냈다.

“무섭습디다. 가게 문을 닫으면서 나중에 주기로 한 가구대금이며 거래처 대금의 상환 기일이 다가오는데······."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당장 필요한 몇백만원의 돈을 갚고, 돌아서면서 새로운 상환금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법무사는 부도나 파산 같은 방법으로 남은 재산을 지킬 방법을 제시했지만, 카톨릭 신자의 양심으로 그럴 수는 없었다.
“작년에 집을 팔아서 모두 갚았어요. 그러고 나니 얼마나 가벼운지.”

귀어학교 학생들과 함께 한산도를 방문했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그후 진열 씨는 지자체마다 전화를 해 “귀어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귀어민 교육 프로그램 같은 게 있나요?” 하며 보이지 않는 길, 보이지 않는 문을 찾았다.

진열 씨의 핸드폰에는 거제, 남해, 고성, 통영 등 남해를 끼고 있는 도시의 시청 수산과 담당자들의 전화번호가 빼곡하다. 그 간절한 바람이 이끌어 준 것일까? 드디어 통영시청에서 진열 씨의 손을 잡았다.

“6월에 해양과학대에서 귀어학교를 개교합니다. 거기 신청하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운동을 한다.

진열 씨는 그길로 귀어학교에 접수했다. 그리고 지난 6월 22에 입학을 했다. 부산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이 보고 싶긴 하지만, 젊음이 약동하는 대학 캠퍼스에서 새로운 인생을 배운다는 행복이 그리움을 충분히 상쇄하고 남는다.

귀어학교 프로그램은 2달간 이론과 실기를 병행하는 실전 중심의 프로그램이다. 교육비만 330만원에 달하지만, 학생들은 이에 대한 세금 33만원만 내고 교육을 받는다.

기숙사와 점심도 제공해 주고, 실습을 지도할 어민들에게도 지원금도 주니 눈치보며 일을 배울 필요가 없다. 정착하게 될 때는 정착자금을 싼 이자에 대출해 주고, 3년 동안은 매월 100만원씩 생활비도 지원해 준다.

“정말 감사하죠. 이런 지원에 힘입어 제대로 인생2막을 준비해 보렵니다.”

김진열 씨는 통영의 깊푸른 바다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귀어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과.

 

부산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은 기숙사 생활을 하는 지금, 오히려 더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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