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현대가 주목하는 문화유산 옻칠

지금 청와대 사랑채에서는 ‘나전과 옻칠 그 천년의 빛으로 평화를 담다’는 제목으로 남한과 북한의 옻칠예술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9월 28일까지).

오천년 역사 속에서 같은 유산을 물려받은 남과 북이, 단절된 시간에도 불구하고 옻칠공예를 통해 동질성을 확인하는 뜻깊은 전시회다.

청와대 사랑채 전시회

이렇게 옻칠예술은 남과 북이, 또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모두 소중하게 되살려내고자 하는 전통이다.

그리고 이번 기획취재 서두에서 언급했듯, 통영은 마땅히 옻칠예술의 부활을 주도해야 하는 옻칠의 본고장이다.

통영이 잃어버린 것

세계의 도료를 연구하는 독일의 바스프(BASF MUSEUM FUR LACKKUNST) 박물관에서는 세계 도료 지도를 만들면서 한국의 여러 옻칠도시를 탐방하고는 “KOREA의 옻칠 허브는 통영”이라고 표기했다. 통영이 한국을 대표하는 옻칠의 고장이라는 것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문화예술 자산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정작 옻칠 도시 통영은 통제영 12공방, 도립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와 김봉룡 선생의 전통을 너무 쉽게 잊어버렸다. 심지어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그 자체의 중요성보다 국민화가 이중섭이 2년간 머물렀다는 사실로 더 유명하다.

최근 통영시가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도 사실은 이중섭의 후광이 크다. 통영에서 작품활동의 르네상스를 맞은 천재화가의 행적은 되살려야 할 것이 분명하지만, 도립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의 1951년-1962년의 역사가 이중섭 화가의 2년 역사 뒤로 묻힐 일은 분명 아닐 것이다.

통영에서 활동하던 12공방의 후예들은 6.25의 칼바람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장인의 길을 버렸다. 그나마 가난과 싸우면서 전통을 이어간 몇몇 장인들은 통영을 떠나 자신의 기술을 알아주는 다른 도시로 갔다. 옻칠 장인의 경우, 옻나무 산지인 원주로의 이주 경향이 뚜렷했다.

항남동에 있는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자리. 이중섭이 2년간 머물렀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원주로 이주한 통영의 나전칠기 장인들

1968년 김봉룡 선생이 원주옻칠공예사의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이주하자, 그의 제자인 중요무형문화재 나전장 제10호 이형만 장인(74세)은 1980년에, 칠화칠기 양유전 장인(70세)과 설명돌 장인(69세)은 1974년 무렵에 원주로 갔다.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이형만 장인뿐 아니라 양유전, 설명돌 장인은 모두 통영에서 태어나 김봉룡 선생 문하에서 나전칠기를 배운 실력가들이다.

옻나무의 산지에 불과했던 원주시는 김봉룡 선생과 제자들의 업적에 힘입어 ‘옻칠공예의 중심지’를 자처하게 됐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고향 통영을 두고, 왜 그들은 원주로 갔을까? 그것도 잠깐 머무르는 곳이 아닌, 그곳에 뿌리내리고 원주를 제2고향 삼아 그곳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것일까? 원주는 어떤 매력으로 통영의 장인들을 이끌고 있을까?

원주시역사박물관

옻나무 원산지, 장인을 품다

원주는 원래 좋은 옻나무가 많아, 일제시대부터 옻칠도료 생산회사가 있을 정도로 옻칠원료 중심지로 주목받았다.

김봉룡 선생은 1968년 ‘원주칠공예사’의 소장으로 청빙되어 원주로 이주했다. 

김봉룡 장인의 나전공작무늬 서류함

당시 이 회사는 소목에는 송강원, 나전에는 신부길, 김봉룡 같은 대작가들을 모시면서, 원주가 옻칠도료뿐 아니라 나전칠기에도 정통성을 갖게 되는 데 큰 몫을 했다.

원주에서 산 26년 동안 김봉룡 선생은 국내 최고 장인으로서 불모의 땅 원주에 옻칠공예를 발전시켰다.

1975년 미국 존슨대통령의 방한 선물이 김봉룡 선생의 ‘공작무늬 나전칠서류함’이었다.
이 작품은 당시 청와대의 요청으로 2점을 만들었는데, 그 한 점이 지금 원주 시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봉룡 선생이 1994년에 돌아가시자, 원주시립박물관의 박종수 관장이 각고의 노력 끝에 선생의 유작을 모은 것이다.

원주시역사박물관에는 아예 전시실 하나가 ‘김봉룡 전시관’이다.

김봉룡전시관에는 1925년 프랑스 제2회 세계만국 박람회에 나가 받은 은상과 시기별 작품은 물론, 직접 만든 통영갓, 선생이 사용하던 작업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김봉룡의 나전도태넝쿨무늬 화병

원주시전국공예대전에서는 7년 전부터 김봉룡 선생의 호를 딴 ‘일사상’도 제정돼 수상자를 가리고 있다.  김봉룡 선생을 원주시가 기려야 할 인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강원무형문화재 제12호 김상수 칠장, 제13호 박귀래 나전칠기장, 제17호 이돈호 칠장, 제11호 박원동 정제장 등 인간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원주시는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국의 장인들을 원주시로 불러모으고 있다. 원주를 ‘옻칠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또한 원주시는 국내에서 가장 큰 나전칠기 공예대전을 주관한다. 올해로 17회를 맞는 원주시한국옻칠공예대전은 전체 시상금 1억7천만 원의 국내 최대 규모 공예전이다. 수상작은 모두 매입해 원주시가 소유하고 시의 각곳에 전시한다.

원주역사박물관의 일사 김봉룡관

원주시의 공방 지원 “작품만 만들라”

원주의 옻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곳은 원주옻문화회관이다.
원주시 중심가에 있는 이 옻문화회관은 원래 교육청에서 도서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는데, 2008년 원주시가 13억원을 들여 리모델링한 다음에는 오롯이 옻칠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옻문화회관에는 공방이 8개가 있다. 2008년 당시 원주시에서 활동하던 옻칠작가를 모두 입주시킨 공방이다.

원주옻문화센터 김상수 관장

옻문화회관의 김상수 관장은 “치악산 아래 칠기공예관에는 김영복 장인이 작품활동을 하고 계시고, 폐쇄된 한지공예관에도 대전과 서울의 옻칠 장인을 모셔와 옻칠 고장으로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말한다. 원주시는 장인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자.”고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옻문화회관에 입주한 공방은 월세는 물론, 전기세, 수도세도 내지 않는다. 오히려 원주시에서 상주직원 2명을 포함하여 공방운영비를 연간 1억 이상 지원하고, 옻액도 50%를 지원해 준다. 옻액을 채취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옻나무도 지원해 준다.

코엑스나 다른 지역에서 박람회를 하고자 하면 1개당 200만원 정도하는 부스를 2개까지 지원해 준다. 1층에 판매장도 마련해, 판로도 열어준다. 이 모든 지원의 유일한 조건은 작품활동을 열심히 하라는 것.

이형만 나전장의 경우 본인의 작업실은 따로 두고, 옻문화회관의 공방에서는 가족들이 그릇, 도마, 수저 같은 생활용품만을 만든다. 생활 속에서 옻칠을 만나게 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원주옻문화센터.

시민을 향한 지원 “배우려는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최장 6년까지 배울 수 있는 공예교실

옻문화센터는 1년 중 6개월 동안 목공반, 나전칠기반 초중급 등 옻칠교실 4개를 운영한다.

강사는 무형문화재급 이상의 장인들이며, 한 반에 10~15명씩, 전체 40~50명 사이의 회원들을 받아 최대 6년 동안 교육한다.

원주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교육센터이니만큼 ‘원주시민 우선 모집’이지만, 인원 미달시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대개 원주 시민만으로도 모집이 끝나기 때문에, 옻칠을 배우기 위해 원주로 이사 오는 사람도 간혹 있다고.

“전라도 광주에서 하루도 안 빠지고 와서 교육받는 사람이 있었어요. 또 과천에서 온 회원은 이곳에서 배워 아예 직업을 바꾸기도 했지요.”

늦은 나이에 옻칠의 매력에 빠져 산다는 수강생

국가무형문화재 칠장인 김상수 관장은 옻문화회관이 옻칠 인구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문화 예술을 바라보는 안목은 그냥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자꾸 전시장을 찾고 보고 듣고 현장에서 배워야, 얼마나 매력 있고 소중한지 알게 되고 그만큼 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실제로 문화회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너무너무 재미있다.”며 더 젊어서 배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원주옻문화회관에서는 가치에 대한 공부를 통해 문화를 잇고 있다.

공예교실에서 옻칠 삼매경에 빠져 있다.

“고유문화는 개인이 지키기 어렵다”

“문화가 없어지는 것은 나라의 근간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고유문화는 개인의 힘으로 지키기는 어렵지요. 관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문화가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상수 관장은 원주시가 옻문화도시로 발돋움하게 된 데는 원주시의 초대와 3대, 4대 시장을 지낸 김기열 전시장의 공이 크다고 말한다. 또한 원주시역사박물관의 박종수 관장이 김봉룡 선생의 가치를 알고, 적극적으로 옻공예 육성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원주시역사박물관의 박종수 관장은 김봉룡 선생의 장남 김옥환 선생을 만나러 대전을 오가며 적극적으로 원주의 옻문화정책을 소개하고 김봉룡 선생의 유작을 기증받았다고 한다. 이에 원주시의회는 2012년 본예산에 역사박물관 유물구입비를 1억원이나 증액하며 힘을 보태 주었다.

통영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옥환 씨가 “통영나전칠기 발전을 위해 언제든지 아버지의 유품을 통영에 전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는데도, 통영시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다가 엄청난 자산을 잃고 말았다.

원주옻문화회관의 김상수 관장은 “관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며 “전 시장님과 공무원, 시의회에서 그만큼 관심을 가졌으니 원주가 나전칠기의 명산지가 됐다.”고 말한다.

김봉룡 선생님 덕에 원주가 나전칠기의 터전을 마련하고 지금도 통영의 장인들이 원주의 인간문화재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통영으로서는 퍽 씁쓸하고 미안한 일이다.
장인의 근간이 되었을 통영 바다, 통영의 공방을 갖고 있으면서도, 장인들이 돌아올 만한 바탕을 못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의 도시 통영시는 ‘고향을 그리면서도 돌아올 마음은 먹지 않는’ 장인들의 마음을 무거운 마음으로 헤아려보아야 할 일이다.

원주옻문화센터 전시실에는 공예대전 입상작이 전시돼 있다.
원주옻문화센터에 전시된 공예대전 수상작
원주옻문화센터에 전시된 공예대전 수상작
원주옻문화센터에 전시된 공예대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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