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이 보내온 일기

2018년 6월 8일 금요일

여섯 살 때부터 스물한 살까지 통영에서 사랑받고 관심 받으면서 죽 커왔다.
오늘 지금까지 통영엄마가 모아준 자립지원금을 받았는데 기분이 묘하다.
좋으면서 또 섭섭하기도 하고 무언가 자랑스럽고 뿌듯한데 마음 한구석이 비어진 느낌….

피 한 방울 안 섞인, 막말로 하면 남인 나를 정말 친딸처럼 이뻐해 주시고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게 이끌어주셔서, 내가 대학교도 가고 직장도 다니면서 월급도 받게 됐다. (중략)
아플 때는 챙겨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서럽고 통영 집이 너무나도 그립지만, 이 또한 내가 성장하는 과정이겠지.

엄마가 너무 존경스럽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타도시로 자립해 나간 큰딸아이가 화장품세트와 함께 일기 형식의 손편지를 보내 왔다.

일기 속 엄마는 혼자 살아가야 할 딸아이 생각에 마음이 애련하고 아리다.
통영 아이들둥지 장계영 원장의 이야기다.

둥지엄마는 자녀가 많은 집 가장일 뿐이다.

“식구가 좀 많을 뿐, 평범한 가정입니다.”

아이들둥지는 갖가지 이유로 원가정에서 분리된 아이들이 모여 사는 집이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양육을 포기하거나 “어디 당해 봐라.” 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낳아 버리고 떠난 엄마의 자녀, 아이들끼리 방치돼 있다는 주민의 신고로 들어오게 된 아이들 등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가족이 필요한 아이들이 모여 산다.
장계영 원장은 15년째 아이들을 품어 키우는 둥지엄마다.

처음 같이 생활을 시작했던 아이들 중에 몇은 이렇게 성인이 되어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원가정으로 돌아간 아이도 몇, 근방에서 원룸을 얻어 독립한 아들도 몇 된다.

정원이 7명으로 정해진 그룹홈 규정에 따라 아이들둥지에는 7명 아이가 산다.
함께 생활하는 사회복지사는 ‘언니’나 ‘이모’가 되고,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는 ‘선생님’이다.

여자 아이들의 그룹홈인 ‘아이들둥지’에는 선생님과 언니가 있고, 남자 아이들 7명이 사는 그룹홈 ‘파란나라’에는 삼촌과 이모가 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삼촌의 품에 안긴다.

꿈이 자라는 파란나라

파란나라 삼촌은 원래 아이들둥지의 후원자였다.
정부 시책이 아동보호시설에서 남녀 구분을 해야 하는 쪽으로 바뀌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남자 그룹홈이 필요해졌을 때쯤, 삼촌은 다니던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원래 제 꿈이 목사가 돼서 의지할 곳이 필요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거였거든요.”

둥지엄마가 후원자이던 삼촌(강명석. 63년생)에게 남자 아이들과 같이 생활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을 때, 삼촌은 오래 전에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자녀들도 다 성장했고 직장도 퇴직해 거리낄 것이 없었다.
삼촌은 미련없이 대전의 삶을 정리하고 통영으로 와서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다. 2012년의 일이다.

여행은 아이들을 크게 만든다.

의리에 죽고 사는(?) 보호관찰소년들

파란나라에서 처음 맡은 아이들은 둥지에 여동생을 둔 오빠(초5) 하나와 어린 나이에 범죄자가 되어 통영보호관찰소에 있던 아이 6명이었다.

여행속에서 즐거움을 찾아주는 삼촌

“보호관찰소에는 1년에 200명 정도 되는 청소년들이 거쳐 갑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지만, 돌아갈 가정이 없는 아이들이 우리집에 왔지요.”

처음 이곳에 온 아이들의 예외 없는 특징은 엄청 많이 먹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예닐곱 그릇은 기본, 삽겹살 같은 건 무서울 정도로 먹어치운다.
한창 먹을 나이인 청소년들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허기진 삶이었던 것.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 학교 간다고 하고 놀러가는 아이, 지갑 털다 경찰에 잡혀가는 아이…. 초창기 삼촌의 생활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여기가 진짜 가족이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아이들은 마음을 연다. 둥지에 엄마가 있기 때문에 부부가 아닌 삼촌을 아빠라고 부르면 족보가 꼬이게 되는데도, 마음을 연 아이들은 삼촌을 아빠라고 부른다.

호기심 충만, 개구쟁이들

“폭식이나 도벽은 6개월에서 1년이면 싹 없어지는 것 같아요. 신뢰하지 않을 때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지만, 나를 아빠라고 믿게 되면 아이들은 정말 의리가 있습니다. 무거운 거라도 들라 하면 자기가 할 거라고 얼른 달려오지요.”

7년이 지나는 동안 보호관찰소년 8명이 들어와 7명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떠났다.

4명은 원가정으로 돌아가고, 3명은 자립해 근처에 원룸을 얻어 산다. 지금도 어슬렁거리며 찾아와 “집에 쌀 떨어졌어요. 밥 주세요.” 하는 덩치 큰 아들들이 삼촌은 귀엽기만 하다.

“생일 챙겨줄 후원자 기다려요”

큰아이들이 자립을 해도 둥지와 파란나라 식구 수는 변함이 없다.

새로운 동생들이 그 자리를 메꾸기 때문이다.
둥지엄마와 파란나라삼촌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따뜻한 생일상 차려줄 후원자가 생기는 게 소원이다.

“아이가 잘 크는지, 어느 학교 다니는지, 좋아하는 게 뭔지 늘 관심을 가져주고, 생일 같은 때 데려가서 외식 한번 시켜 줄 수 있는 후원자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형제가 많다보니 개별적인 관심에 아이들이 목마를까봐, 엄마는 엄마의 자리를 조금 비집어내보인다.
많은 아이의 엄마말고, 누군가는 너만을 바라보는 특별한 사람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은 진짜 엄마 마음이다.

되도록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둥지엄마가 아이들과 식물원을 찾았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한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