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량묘

•••조선시대 도천동•••
초가사당에 모신 첫 제사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셨다!”

장군을 하늘처럼 따르던 수군들과 백성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일본 수군은 전쟁을 끝내고 돌아갈 테니 돌아갈 길을 내어달라 했고, 전쟁에 지친 조선의 조정에서는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편입하라 명을 내렸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기어이 명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섬멸했고, 노량바다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기쁨도 장군을 잃은 슬픔을 상쇄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599년, 통영의 백성들과 충무공 휘하에 있던 수군들은 다가오는 이순신 장군의 제사가 걱정되어, 착량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초가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다. 전란의 수습에 급급했던 조정에서는 생각지도 못하던 일을 백성들이 나서서 한 것이다.

한자어 ‘착량’은 토박이말로 ‘판데’다. 원래 미륵도는 물때에 따라 섬이 되기도 하고 반도가 되기도 하는 곳이었는데, 수로를 만들기 위해 육지와 붙어 있던 곳을 팠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 이를 한자로 하면 ‘착량(鑿梁)’이나 ‘굴량(掘梁)이 된다. 당포해전 당시 참패를 당한 일본 수군이 도망가느라 수로를 만들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착량나루는 ‘송장나루’라고도 불렸는데, 한산도해전에서 죽은 일본수군의 시신이 오도가도 못하고 끼여 있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착량묘의 내력이 적힌 돌비 앞으로
착량 앞바다가 보인다.

“장군, 보이십니까? 이곳이 바로 장군께서 역사를 바꾼 곳입니다.”

부산에서 목포까지 남해 바다 어딘들 장군의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통영의 군민들은 당포해전에 쫓겨가던 일본수군, 한산도해전에서 시체가 돼 겹겹이 쌓여 있던 일본수군의 모습이 고스란히 중첩돼 있는 이곳에 초가사당을 지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04년,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세워졌다. 그리고 어명으로 1606년에 명정동에 충렬사가 세워졌다. 충무공의 제향은 ‘없애지 말고 계속 드려야 하는 불천위’가 되고, 충렬사에서 받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초라한 초가사당에서 충무공이 돌아가신 매년 음력 11월 19일에 기신제를 드렸다.

'착량묘'의 이름을 얻다

270여 년 뒤인 1877년, 제198대 통제사가 되어 통영에 내려온 충무공 10세손 이규석 통제사는 통영 곳곳에 남아 있는 이순신의 흔적을 정비했다. 이순신 생전의 통제영이었던 한산도 제승당에는 ‘제승당 유허비’를 새로 다듬어 세우고, 백성들이 사비를 털어 지은 작은 초가사당은 반듯한 기와집으로 고쳐짓고 ‘착량묘’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래쪽에는 지역주민들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교육공간인 호상재(湖上齋)도 지어 나라사랑의 마음을 가르쳤다.

착량묘는 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충무공이 순국한 날에 기신제(忌辰祭)를 봉행한다.

하늘이 감동한 효자

통영의 통제사는 삼도 바다의 수군을 관할할 뿐 아니라 고을의 수장을 겸했다.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잘한 이에게는 상을 주며 못된 이를 벌하는 일반적인 업무도 겸한 것이다.

도천동에는 제154대 신대영 통제사가 효심에 감복해 하사품과 벼슬을 내린 박지순 공의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영조 35년인 1759년, 박지순 공은 도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해 동네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을 섬기는 데 정성을 다했다.

얼마나 효자였는지, 하늘도 감복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올 정도다.

부친의 병에 두더지가 묘약이라는 말을 듣고 엄동설한 간절한 기도로 하늘을 감동시켜 두더지를 구한 이야기, 오랜만에 친지를 만나 쇠고기를 한 근 사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는데 다리가 떠내려가 버렸으나 솔개가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순조 9년(1809)에는 병든 노모가 죽순국이 먹고 싶다하자 눈보라 치는 한겨울에 목욕재계를 하고 기도를 드려 죽순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겨울에 솟아난 이 죽순은 어머니 병환도 치료하고 통제사에게 올리기도 했다.

이에 감동한 신대영 통제사는 군관이었던 박효자를 선향고외감에 임명해 편하게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사실은 진사 문성준이 효자에 관한 모든 문적을 편집할 때 ‘박효자기실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후대에 전했다.

박효자가 죽은 23년 뒤, 나라에서는 효자각을 지어주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효자각을 지을 재원이 없자, 통영의 56개 마을 군민들이 돈을 모아 이런 사실을 기록한 기실비를 세웠다. 60년이 지난 1893년에는 관에서 정려비도 세웠다.

지금도 도천동주민자치위원회에서는 매년 음력 4월 10일에 제를 봉행하고 있다.

백운서재

배움의 전당 백운서재

마을의 유림들이 돌봤던 착량묘는 이규석 통제사가 고쳐 짓기 전에도 수 차례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정조~헌종 때의 선비로 통영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백운선생이 쓴 '착량묘 중수기' 같은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1783년(정조 7)에 태어난 백운 고시완 선생은 어릴 적부터 우애가 지극하고 학문이 뛰어났다.

천암산 기슭에 두어 칸의 집을 짓고 강당(講堂)을 여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역대상도해(易大象圖解)’상하권과‘중용성명도(中庸性命圖)’,‘몽대인기(夢大人記)’,‘혹인문답(惑人問答)’ 등 여러 편을 저술하였고, 수상문(隨想文)과 사실기록문(事實記錄文)도 여러 편 남겼다. 모두 성리학(性理學)을 바탕으로 한 우주의 본체와 인성(人性)을 논한 역작이지만, 제목만 전할 뿐 몇 편밖에 전해지지 않아 애석하다.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던 그가 1841년(헌종 7) 향년 59세로 타계하자, 제자들이 인평동 국재(局峙)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지금도 유림에서 매년 음력 8월의 하정일(下丁日)에 채례(菜禮)를 모시고 있으며, 백운서재는 1983년 8월 6일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통제사를 견제한 마을의 스승 백운선생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백운서재와 연못

길어야 2년. 군사·정치·치안·사법·경제권까지 지닌 통제사의 임기는 고작 1~2년이었다. 통제사가 역심을 품고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스쳐 지나는 곳일 수 있기에, 어떤 통제사들은 바닷가 아름다운 곳을 다니며 꽃놀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제206대 통제사 민형식(閔炯植)도 그런 사람이었다.

보릿고개가 심해 굶어 죽는 이가 부지기수였던 어느 봄날, 통제사는 기생들을 옆에 끼고 풍악을 울리며 용화사로 꽃놀이를 갔다.

“백성은 보릿고개를 넘기느라 끼니도 못 먹고 있는데, 봄놀이라니?”

평생 학문에 전념하여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이(理)와 기(氣)의 흐름을 밝히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던 백운선생은 못된 통제사를 혼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학문에 능통하다 보니 도술까지 부릴 수 있게 된 백운선생은 앞뜰의 연못에 부적을 띄우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통제사를 태운 말의 말발굽이 땅에 달라붙어, 통제사는 그만 말에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통제사의 질문에 이방은 “이는 필시 백운 선생이 도술을 부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통제사가 자중하지 않으면 더한 일도 당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 후 민형식 통제사는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통제사가 되었다고 한다.

백운선생의 연못에는 다른 신기한 이야기도 전한다. 백운선생은 평생 벼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아이들을 모아 글공부를 시켰는데, 하루는 아이들이 통제영의 군점행사를 보고 싶어했다 한다. 백운선생은 아이들을 연못가에 앉혀놓고 계수나무 잎사귀를 손으로 훑어 연못에 뿌렸다. 그러자 잎사귀 하나하나가 전선(戰船)으로 변하여 일사불란하게 군점행사를 벌였다.

이런 믿을 수 없는 도술 이야기가 책으로까지 쓰여 전해 오는 이유는 무얼까? 아마도 통제사가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이곳에 도술에 능통한 선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실제로 우리나라 옛이야기에 나오는 도술에 능통한 도인은 일반백성이 따르고 존경하는 스승이었던 예가 많다.

백성의 편에 서서 백성을 보호해 주는 스승의 이야기가 과장되고 윤색되면서 하늘을 나는 도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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