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룡포는 서쪽은 판데목(掘浦)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양으로 통하고,북쪽으로는 육지에 연결되어 있어 만이 깊으면서도 구석지지 않고 얕으면서도 드러나지 않아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이다.”
1604년, 이경준 통제사는 전후 통제영의 입지를 살피고 두룡포에 통제영을 두기로 했다.
두룡포는 지금 한전 인근 정량동 일대다. 막상 통제영은 조금 더 서쪽에 있는 통영항 위에 이설되었지만,
두룡포의 입지가 통영에 통제영을 두게 한 사실만은 두고두고 기록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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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량동은 통영이 시작된 곳이다.
1604년, 이경준 통제사가 통제영을 설치하기로 한 두룡포가 바로 지금의 한국전력(주) 일대, 정량동을 말하기 때문이다.
1개 읍 6개 면 8개 동을 갖고 있는 좁은 통영에서 한 동 안에 공원 3개, 항구 2개를 갖고 있는 동이 정량동말고 또 있을까? 이순신공원, 남망산공원이 오롯이 정량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동피랑의 3분의 2가 정량동이다.
통영의 심장 통영항(강구안)의 반이 정량동 소재이며, 통제영 초기부터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해온 동호항이 정량동에 있다.
그뿐인가. 수산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협이 모두 정량동에 있거나, 정량동을 거쳐 갔다. 현재 정량동에는 멸치권현망 수협과 통영수협이 있다.
굴수협, 근해통발수협도 원래는 정량동에 소재하고 있었다.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의 전신인 통영수산학교도 정량동에서 시작됐다.
문화예술의 자원도 타동 못지않다. 무엇보다 김춘수 시인의 생가가 정량동에 있으며, 유치환 시인의 문학관이 이곳에 있다.
통영전통예술전수관이 있어서, 남해안별신굿과 승전무, 오광대의 전승이 이어지는 곳도 이곳이다. 
그러니 정량동은 통영의 역사와 함께 산업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300년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정량동이라는 이름은 ‘정동’의 정(貞)자와 ‘면량동’의 량(梁)자를 각각 따서 정량리(貞梁里)라 칭한 것에서 유래했다.
정동은 원래 기와를 구웠던 와동(애앳골)에서 변천된 말이고, 면양동은 메웠다는 뜻의 멘데를 한자어로 이른 말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이들 2동리와 인근 항북동 및 장대동의 일부지역을 통합하면서 부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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