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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량동 이야기 1] 통영의 시작, 정량동 두룡포
김선정 기자 | 승인 2018.12.03 16:03

“두룡포는 서쪽은 판데목(掘浦)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양으로 통하고,북쪽으로는 육지에 연결되어 있어 만이 깊으면서도 구석지지 않고 얕으면서도 드러나지 않아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이다.”
1604년, 이경준 통제사는 전후 통제영의 입지를 살피고 두룡포에 통제영을 두기로 했다.
두룡포는 지금 한전 인근 정량동 일대다. 막상 통제영은 조금 더 서쪽에 있는 통영항 위에 이설되었지만,
두룡포의 입지가 통영에 통제영을 두게 한 사실만은 두고두고 기록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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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량동은 통영이 시작된 곳이다.
1604년, 이경준 통제사가 통제영을 설치하기로 한 두룡포가 바로 지금의 한국전력(주) 일대, 정량동을 말하기 때문이다.
1개 읍 6개 면 8개 동을 갖고 있는 좁은 통영에서 한 동 안에 공원 3개, 항구 2개를 갖고 있는 동이 정량동말고 또 있을까? 이순신공원, 남망산공원이 오롯이 정량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동피랑의 3분의 2가 정량동이다.
통영의 심장 통영항(강구안)의 반이 정량동 소재이며, 통제영 초기부터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해온 동호항이 정량동에 있다.
그뿐인가. 수산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협이 모두 정량동에 있거나, 정량동을 거쳐 갔다. 현재 정량동에는 멸치권현망 수협과 통영수협이 있다.
굴수협, 근해통발수협도 원래는 정량동에 소재하고 있었다.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의 전신인 통영수산학교도 정량동에서 시작됐다.
문화예술의 자원도 타동 못지않다. 무엇보다 김춘수 시인의 생가가 정량동에 있으며, 유치환 시인의 문학관이 이곳에 있다.
통영전통예술전수관이 있어서, 남해안별신굿과 승전무, 오광대의 전승이 이어지는 곳도 이곳이다. 
그러니 정량동은 통영의 역사와 함께 산업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300년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정량동이라는 이름은 ‘정동’의 정(貞)자와 ‘면량동’의 량(梁)자를 각각 따서 정량리(貞梁里)라 칭한 것에서 유래했다.
정동은 원래 기와를 구웠던 와동(애앳골)에서 변천된 말이고, 면양동은 메웠다는 뜻의 멘데를 한자어로 이른 말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이들 2동리와 인근 항북동 및 장대동의 일부지역을 통합하면서 부르게 됐다.

 

두룡포
지금 두룡포는 없다. 아주 오래전에 매립돼 ‘멘데(메운 곳)’라는 지명만이 이곳이 포구였음을 알게 할 뿐이다. 19세기 중엽에 그려진 통영지도에 뚜렷한 만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아 그 이후에 매립된 것을 짐작할 뿐, 정확히 언제 멘데가 됐는지는 모른다.
조선전기의 통영은 행정상 거제현에 속한 조그마한 포구로서 두룡포(頭龍浦)라 불렸다.
원래는 지금의 정량동 한전이 자리한 일대의 수심이 얕은 내만을 가리켰지만, 뒤에 부근 해안을 통칭하면서 옛통영 전체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통제영이 들어서기 전에는 사람들이 해안의 좁은 구릉지대에 띄엄띄엄 작은 마을을 이루고 농사짓기와 고기잡이를 겸하며 살고 있었다.

반씩 걸친 정량동
구도심이어서 그럴까? 정량동은 반씩 걸친 구획이 많다. 공설운동장, 중앙시장, 강구안, 동피랑 벽화마을이 이웃 북신동이나 중앙동과 반씩 걸쳐 있다.

선무원종공신 염언상 묘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염언상 장군의 묘다. 전남 보성 출신인 장군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옥포와 한산대첩에 큰 공을 세웠다.

항남동과 중앙동 그리고 동호동의 해안지역으로 형성된 포구이며, 강물이나 냇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어귀인 하구라 하여 강구라 칭했다.

 

산이 되어버린 섬, 장좌도
장좌섬 인근은 1928년에 매립공사를 시작하여 1933년에 완공했다. 이로써 원래 섬이던 장좌도는 산이 되어 버렸다.  뒤이어 1934년에는 남망산 지선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해 현재의 동호동 해안일주도로의 원형을 만들었다.

남망산
동호동 해안에 있는 해발 약 72m의 작은 산이다. 통영고을의 남쪽 맞은편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망(南望)으로 칭했으며, 후에 다시 산(山)자가 첨가되어 남망산(南望山)이 됐다. 망(望)은 산봉우리 및 산등성이를 뜻하는 통영 사투리다.

정량동 떰바우
동피랑 근처 옛 덤박골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를 떰바우라 했다. 이 떰바우에는 통제사 김영의 각암비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1829년(순조 29) 겨울, 동피랑 언덕에 큰불이 나 지금의 동호동 일대와 정량동 일부지역의 민가 수백 호를 태운 일이 있었다.
김영 통제사는 떰바우에 올라 지팡이를 들고 수일 동안 군민의 진화작업을 지휘하여 가까스로 불길을 잡았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집이 몽땅 불타버렸으니 백성의 살길은 막막했다.
"산에 있는 소나무를 베어 집을 짓도록 하라." 김영 통제사는 마을사람들이 겨울을 나도록 벌목을 허락했다.
그러나 다음해 봄, 김영 통제사는 산림보호법을 어기고 소나무를 남벌하였다는 죄로 파직되고 말았다.
"우리를 위해 파직된 김영 통제사의 사연을 바위에 새기자."
군민들은 그가 지휘하던 떰바우 위에 김영 통제사의 은덕을 기리는 글을 남겼다. 그러나 이 바위는 근래 도로를 내면서 없어졌다.

청마문학관
원래 청마의 생가는 중앙시장 인근의 번화가여서  문학관을 지을 수 없어 인근 정량동에 생가와 문학관을 지었다.

멘데의 메워지는 역사
통영은 땅이 좁아 통제영 시절부터 해안을 매립해 농지를 확보해 왔다.  일제시대에 들어서서, 현재 소규모 조선소들이 산재한 동호동 남망산과 장좌섬 일원의 조선소 부지들과 해안도로가 매립됐다.
일제강점기 동안 멘데마을은 몇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일 뿐, 대부분 농경지였다. 그러던 것이 1969년에 남망산공원 입구에서 항북(항구목) 사이의 공유수면 1,231평을 매립하면서 주거지가 늘어났다.
또다시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동호항 매립공사를 했고, 동호항은 철공단지가 조성된 어항이 됐다. 철공단지는 소형선박의 수리에 꼭 필요한 공업지역이지만, 그만큼 주거지 환경은 열악해졌다.

망일봉
정량동과 용남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약 148m의 산으로,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통영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망일이 됐다. 토박이발음으로는 일명 매일봉이라 한다.

정량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에 따라 지난 7년간 하천공사를 해, 한전 뒤까지 공원을 조성했다.

비석골
정량동 서북쪽지역의 골짜기 및 마을의 옛 지명이며, 옛 통영성의 북문 및 동문 밖의 고갯길에 통제사선정비를 비롯한 효열비 등의 각종 비석들이 즐비했던 것에서 유래했다.

 

 

 


 

김선정 기자  64440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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