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피난민인 이중섭은 1956년에 짧은 생을 등졌다.
부산, 제주, 통영을 떠돌며 너무 가난해 은지에 그림을 그린
이 천재화가는 통영 시절에 가장 많은 유화작품을 남겼다
.

1951년 12월, 11개월의 서귀포 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간 이중섭은 은지화를 그리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까지 이르자, 일본인 아내 마사코는 아이들과 함께 일본인 수용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1952년 7월, 3차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가족을 보내고 실의에 빠져 있던 이중섭은 유강렬의 권유로 통영으로 왔다.
통영에는 일본에서 같이 수학했던 서양화가 김용주가 있었고,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 기거할 장소가 있었다.

이중섭이 오자 통영의 예술인들은 두 팔 벌려 맞아주었다. 이중섭의 친구인 박고석은 이 시절 이중섭을 회상하면서 “떨어진 가족에게 향하는 마음과 스미는 고독감, 막연하기 그지없는 생활책 등 막바지에 부딪치는 듯한 불안을 안고 중섭은 오로지 제작에만 몰입했다.
강렬 형의 뒷바라지는 극진했고, 중섭은 무아무중 북받쳐 흐르는 일체의 한을 전심전력 작품에 처부었다.”고 썼다.
유강렬은 물론, 김용주, 석수성, 전혁림 등이 이중섭의 통영 생활을 도왔다. 김상옥, 유치환, 김춘수 같은 문인들도 이중섭과 교류하면서 예술적 교감을 나눴다.

살림살이가 넉넉했던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는 구하기 어려운 유화물감을 나눠 주기도 했다. 이 덕에, 종이 살 돈도 없어 담뱃갑의 포장지인 은지에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은 그나마 통영에서 흰소, 황소, 달과 까마귀 같은 유화를 그릴 수 있었다.

1952년 이중섭은 중앙동 녹음다방(중앙우체국 앞)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4인전을 열었다. 이듬해인 1953년에는 항남동 성림다방(우리은행 앞)에서 개인전을 열어 40여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아이들과 게, 소, 닭 같은 소재를 좋아했던 이중섭은, 통영에서는 이례적으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유화물감을 사용할 수 있는 시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이 이중섭의 마음을 어느 정도 어루만져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중섭은 통영에 살면서,

당시 통영 1번가로 통하던 항남동 도깨비골목의 술집과 지금은 없어진 중앙동 다방들에는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며 시린 가슴을 달랬을 천재화가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전쟁이 끝나고, 정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간 이중섭은 간염과 조현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로이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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