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은 통영이 자랑하는 시인이다.
중앙시장 앞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유준수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이 유치진이고 차남이 유치환이다.
극작가 유치진은 수준 높은 희곡 작품을 쓰고 연극인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등 한국 연극의 새로운 장을 연개척자이다.
통영에서도 극단을 창단해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을 공연했다.
유치진으로 인해 통영은 '신연극의 발상지'라고 불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유치진은 일본에 부역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그래서 통영에서는 유치진의 이름이 철저히 지워졌다. 예술적 업적을 기리며 세우려던 흉상도 끌어내려졌다.
그런다고 해서 유치진이 통영에서 올렸던 연극이며 그가 쓴 작품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건만, 아직도 통영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한다.
그러나 유치환은 통영이 사랑하는시인으로 남았다.
유치진의 행적으로 인해 유치환도 친일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지만, 이는 한낱근거 없는 해프닝으로 결론났다.
오히려 유치환은 1945년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해 회장직을 맡으면서, 통영의 문화예술 발전에 큰 힘을 기울였다.

 

유치환은  십대시절마음을 주고받던 권재순과 스물한 살에 결혼했다.
이 결혼식의 들러리를 섰던 화동 중 한 명이 일곱살이었던 김춘수다.
권재순은 통영 최초의 유치원이었던 진명유치원의 교사였다.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진명유치원은 통영 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일제는 우리 민족에 힘을 보탠 호주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하고 유치원을 비롯한 진명학원을 강제로 폐쇄했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 권재순은 남아 있는 적산가옥을 불하받아 문화유치원을 시작했다.
시인, 화가들과 어울려 말술을 마셨다고 알려진 청마 유치환은 충무교회 내에 있는 문화유치원 사택에서 살림을 살았다.
교회 사택 1층은 권재순 원장이 원장실로 사용했고, 2층은 청마 유치환의 작업실 겸 통영문화협회 사무실로 썼다.


유치환의 작업실에는 윤이상, 정윤주, 김춘수 등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모였다.
통영여중 국어교사로 재직할 때, 유치환은 가사교사로 온 이영도 시조시인을 연모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이영도는 유부남인 유치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영도 시인은 언니가 운영하는 수예점에 자주 놀러갔었다 한다.
그 수예점은 청마우체국으로 유명한 중앙우체국 앞에 있었는데, 유치환은 우체국 창문에서 수예점을 바라보며 이영도 시인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중앙우체국 앞에는 유치환이 쓴 '행복'이라는 시비가 두 사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런 사연으로 문화유치원이 있던 충무교회에서 중앙우체국의 거리에는 '청마거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마거리를 나서서 몇 걸음 더 가면 초정거리가 나온다.
초정 김상옥의 생가가 있는 골목이다.
김상옥이 살던 시대, 이거리에는 갓공방이 20곳 정도 밀집해 있었다.
김상옥의 아버지도 갓 장인이었다.
김상옥은 통영의 장인과 예술인들이 밀집한 동네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초등학교를 마치고 인쇄소에 들어가 일을 했지만, 김상옥은 시뿐 아니라 서화, 도자기, 전각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예술성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세 번이나 옥고를치르기도 한 초정은, 한국적 정서를 쉽고 친근한 언어로 풀어낸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마가 애달픈 편지를 쓰던 우체국앞과 어린 초정이 형들의 동인지를 보며 설렌 꿈으로 밤잠 설치던 옛집이 있는 중앙동 골목엔 짙은 문학의 향이어려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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