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림이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한자식 표기다. 따라서 동백림사건은 동베를린사건이라고도 한다.

지금부터 52년 전인 1967년 당시 서독 베를린에 거주하던 음악가이자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포함해 교수·예술인·의사·공무원 등 194명이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활동을 하고 이중 일부는 입북하거나 또는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뒤 남한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했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했던 사건이다.

1967년 7월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관련자인 임석진(당시 34세)씨가 귀국해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검찰 공소장에는 북한은 1957년부터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통행이 비교적 쉬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대남공작 경험자 박일영을 동독대사에 임명했다고 한다. 또 조선노동당 연락부에 유럽 공작 총책인 이원찬을 상주시키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해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재학 중인 유학생 및 각계·각층의 장기 체류자들에게 심리적인 공작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 관련자들은 서신·문화·주민의 남북교류와 미군철수, 연립정부수립, 평화통일이 불가능할 때의 무력남침 등에 대비해 각종 간첩교육을 받았고, 그중 11명은 평양까지 다녀온 후 해외유학생·광부·간호원 등의 명단을 입수 평화통일 방안선전, 국내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와의 연계(連繫), 정계 등 각계 요인 포섭, 선거에서 혁신인사 지지 등 지령과 함께 공작금 및 난수표를 받고 간첩활동을 벌여왔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6월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 여사를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고, 이해 12월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해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에게 유죄선고를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상주장학관’을 서독에 급파해 국외 한국인들의 반정부활동을 감시했으며,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윤이상 선생은 1969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재조사 한 후 이 사건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간첩단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3~4명이 대북 접촉 및 활동을 했지만 그 정도가 미약한 편이었으며, 중앙정보원이 당시 대표적인 학생서클이었던 서울대학교 민족주의비교연구회(약칭 민비연)로 수사를 확대하고 이례적으로 수사 도중 7차례에 걸쳐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한 것은 이 사건을 1967년 6·8 부정총선 규탄시위를 무력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특히 중앙정보부가 범죄혐의를 과장·확대하고 특정사실을 왜곡하는 등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 발표했다고 밝혔다. 또 해외 거주 관련자에 대한 불법연행, 조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간첩죄의 무리한 적용과 사건 외연 및 범죄의 확대·과장 등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고 밝혔다.

윤이상 선생은 1969년 자살기도 미수 이후 음악작업을 해도 좋다는 남한정부의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으며,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이수자 여사를 통해 서독에 전달됐다. 이 작품은 1969년 2월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됐는데, 무려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된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은 서독정부와 공동으로 남한정부에 탄원서를 내 윤이상 선생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윤이상 선생은 1967년 12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감형됐고, 1969년 2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윤이상 선생은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199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남한 정부도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사망 후 23년이 지난 2018년 3월 그의 유해가 고향인 통영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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