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지만 실망감도 컸던 박정희 대통령(좌)과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통영 출신 정해주 전 장관<사진/인터넷 캡쳐>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온 흔적이 곧 역사인데 굳이 ‘가정(假定)’해봐야 별반 무소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거나, 아쉬움이 남거나, 심지어 후회막심인 경우 사람은 자연스레 ‘만일 그때 그랬다면’ 또는 ‘만일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하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가정의 행동이나 선택이 가져올 결과 역시 가정적일 수밖에 없어서, 실제로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 지는 결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우리는 그런 역사의 가정을 종종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하게 되고, 범위를 넓혀 공동체적으로도 하게 된다. 가정의 대상이 되는 역사가 나라는 존재와 거리가 멀던 가깝던, 그런 선택이나 행동을 한 자신 또는 선조들에 대한 원망은 자연스레 따라오지만 말이다. 그때 과감하게 그 사업을 밀고 나갔으면 지금쯤 내 형편이 달라졌을 텐데 자조(自嘲)하는 것처럼 아니면 세계사의 흐름에 눈 감은 채 맥없이 강대국들의 희생양이 된 19세기 구한말 선조들을 원망하는 것처럼.

박정희의 친구 김종길이 낙선?

현재를 살아가는 통영사람이라면 이런 소리를 한번쯤은 직간접적으로 들었을 것이다. “1971년 총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동기생인 공화당 김종길 후보를 당선시켰더라면, 통영의 지금은 달라졌을 텐데...”하는 가정 또는 후회를.

제8대 국회의원 선거는 1971년 5월 27일 실시됐다. 이에 앞서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대통령(1917~1979)은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53.2%대45.3%로 누르고 당선된 상태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10년째였지만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인 여건이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안정적인 정권유지를 위해 총선에서 과반확보는 필수요건이었고,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야권으로서는 개헌선 저지가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구사범 동기 김종길 여당후보로

당시 충무시·통영군·고성군 지역구 의원은 고성 출신의 최석림 의원(1922~1974)이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1963년부터 6대와 7대 연속 당선됐었지만 8대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 대통령은 대신 김종길 후보(1917~?)를 공천했다. 통영 태생의 김종길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생으로 역시 통영 출신으로 재무부 차관을 지낸 서정기씨와 함께 박대통령의 둘 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사법고시에 합격한 김종길 후보를 박정희 대통령이 공천한 것은 한편으로는 도박이기도 했지만, 당시 충무시민들의 마음을 잡으려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당시는 이른바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에 돈 봉투가 판을 치던 때였다. 충분한 선거자금 지원에 관권선거까지 더해지면 여당후보는 야당후보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프리미엄을 안고 선거에 임하게 된다.

 

헬기타고 충무와서 지원유세도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은 투표를 사흘 앞두고 헬기를 타고 충무시로 직접 내려와 친구의 선거유세를 지원했다. 두룡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지원유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길 후보가 당선되면 충무시에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라고 공언했다고 한다. 충무시와 연결도로가 형편없었던 당시 마산과의 4차선 도로개설도 약속했다고 한다.

시민선택은 야당 김기섭 후보

하지만 충무시·통영군·고성군 주민들은 야당인 신민당 김기섭 후보(1916~1979)를 선택했다. 정부여당이 그렇게 물량공세를 했음에도 김기섭 후보가 53.57%의 지지율로 김종길 후보(45.82%)를 누르고 당선됐다. 8대 총선에서 민주공화당은 113석을 얻어 1당 지위는 잃지 않았지만, 신민당이 89석을 얻는 바람에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선을 얻는 데 실패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실망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해 한산도를 성역으로 조성하고, 제1회 한산대첩 축제에도 충무시를 방문했으며, 서정기를 통해 충무관광호텔을 건설한 뒤 종종 머물기도 했던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김종길을 낙선시킨 충무·통영·고성이 꼴도 보기 싫었을지 모른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8대국회를 1년 만에 해산하고, 1972년 유산개헌을 실시해 종신집권의 틀을 갖추게 된다. 선거법 개정으로 부활한 중선거구제로 1973년 치러진 9대 총선에서 충무·통영·고성·거제에서는 공화당 소속 김주안 후보와 최재구 후보가 당선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1990년에야 완공된 충무시-마산시 4차선 확장을 20년 넘게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김종길 후보가 3번 연속 당선됐다면 적어도 1979년까지 충무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대통령과 절친인 여당 국회의원이라는 황금의 조합 아래서.

총리 신임 1인자 정해주의 낙선

거친 바다사나이들이 투박한 경상도 말씨로 당장이라도 멱살잡이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통영이지만, 출중한 인재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 인재 중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사라져간 인물의 하나로 아직도 많은 시민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이는 정해주 전 장관이다.

정해주 전 장관은 1943년 충무시 태생으로 통영고-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68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공직에 뛰어들어 전두환 대통령 비서실 경제담당(1980), 중소기업청장(1996), 통상산업부 장관(1997), 진주산업대 총장(2001), 한국항공우주산업 사장(2004)을 역임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첫 국무총리는 대선에서 연합했던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였다. 정해주 전 장관은 1998년부터 2년 동안 김종필 국무총리 산하 국무조정실장을 맡으며 업무능력을 인정받은 뒤 김 총리로부터 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IMF사태를 극복하고 21세기에 들어서며 IT산업과 문화산업 육성에 공을 들이던 국민의 정부로서는 다양한 분야서 경험이 풍부한 인재와 더불어 안정적인 국회의석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여당은 2000년 16대 총선에 정해주 전 장관을 공천할 계획이었으나, 이미 통영·고성은 신한국당 세상이었고, 야당후보는 현역 김동욱 의원이었다. 김동욱 의원은 부친이 김기섭 전 의원으로, 원래는 민주계였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3당 합당 때 그를 따라간 뒤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됐었다.

촌놈발언 마타도어에 KO패

김종필 총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정해주 후보였지만, 여당에 대한 반발심이 강한 지역민심을 거스를 수 없어 자민련 공천을 버리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2000년 총선에서 약5000표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다. 김동욱 의원은 3만5521표(38.26%)였고, 정해주 후보는 3만485표(32.83%)였다.

무소속으로 거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선거 막판에 터진 ‘촌놈발언’ 논란으로 표가 깎이며 역전패를 허용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정해주 후보의 ‘촌로들’ 발언이 ‘촌놈들’로 와전된 마타도어라는 것이 아직도 정설로 전해지고 있다.

'차떼기'에도 선택은 한나라당

낙선 뒤 진주산업대 총장으로 재임했던 정해주 전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인 2004년 4월 17대 총선에 다시 출마했다.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로 역풍을 맞은 데다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국민적인 비난 속에 치러진 총선이었다.

2000년 총선에 이어 정해주 전 장관은 2004년에는 열린우리당 당적으로 출마했다. 당시는 탄핵역풍 속에 진의장 통영시장도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할 때였다. 총선 맞상대는 판사 출신으로 30대 후반의 젊은 김명주 변호사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통영시·고성군 주민은 야당 후보를 선택했다. 김명주 후보가 4만5115표(53.34%)를 획득했고, 정해주 후보는 3만6672표(43.36%)를 얻었는데 민주당계 후보로 통영·고성 출마자 중 역대 최다 득표라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때도 “참여정부가 정해주의 약점을 잡고 있어서 강제로 입당했다”는 가짜뉴스가 상당히 먹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소속의 진의장 시장이 재임 중인 상황에서 열린우리당 소속의 국회의원이 당선됐더라면 통영시와 고성군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은 부질없는 망상일까?

아주 오랫동안 보수적인 투표성향을 보였던 지역에서 민주계열의 후보가 당선됐고, 그래서 시장-국회의원-대통령이 같은 여당이었다면 진보계열에 냉담한 여타 PK지역에 모범사례를 보여주자는 정치적 계산에서라도 중앙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정책이 이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비약인 걸까?

여당 시장후보 안휘준의 낙선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진보적이고 민주정당 계열 성향을 보이며 여당 김종길 후보를 낙선시키고, 2000년과 2004년에는 극히 보수적인 정치경향을 드러내며 정해주 후보를 낙선시킨 통영시민이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무소속 후보를 당선시켜 다시 생각해봐도 어리둥절한 지역정치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1994년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이래 초대 민선시장의 영광은 민자당의 고동주 시장이었고, 2대 시장도 당적만 신한국당으로 바뀐 고동주 시장이었다. 2002년 3대 민선시장에는 당시 51세의 무소속 김동진 시장이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가 되면서 이듬해 10월 재선거에서 역시 무소속 진의장 시장이 당선됐다.

이듬해 한나라당이 탄핵역풍을 맞는 가운데 진의장 시장이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사실은 이미 밝혔거니와, 그는 2005년 9월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같은 해 11월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6년 4회 지방선거에서 진의장 시장은 야당인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됐고, 2년 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며 여당 소속의 통영시장-국회의원-대통령 라인을 완성하게 된다.

모처럼 당적 같았지만 ‘물과 기름’

하지만 진의장 시장은 2010년초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고, 이로 인해 2010년 제5회 지방선거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결국 한나라당 공천을 받은 이는 안휘준 현 통영시체육회장이었고, 맞상대는 2002년 시장 당선 무효 뒤 야인으로서 절치부심했던 무소속 김동진 후보였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 때인데다 지역 국회의원은 이군현 의원(18대)이었으나 시민들의 선택은 여당 공천을 받은 안휘준 후보가 아니라 무소속 김동진 후보였다. 이군현 의원과 ‘물과 기름’의 관계였던 김동진 시장은 당선되고 18개월 뒤인 2011년 12월 한나라당에 입당하지지만, 임기 내내 이군현 의원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지역발전 ‘복’ 우리가 걷어찼다

여당 소속 시장과 여당 국회의원을 통해 지역발전을 꾀한다는 기대는 또다시 물거품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소조선업 몰락의 전조가 보이던 시기에, 두 사람의 마음만 잘 맞았다면 성동조선해양이 우리가 알고 있는 비극적 운명을 맞지 않았을 지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위 세 번의 기회에서 통영시민들이 반대의 선택을 했더라면 우리의 현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새삼 확인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건데 대통령과 우리 지역 국회의원이 같은 정당 소속이고, 시장까지 같은 정당이라면 어느 모로 보나 지역발전을 노릴 좋은 기회가 아닐까?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 지역의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 세 번의 복을 걷어찬 것은 정작 우리 자신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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