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지 거제해금강테마박물관 학예실장>


효율성의 논리는 언제나 우리를 지배한다. 단위 면적당 인구수가 많은 대도시에는 다양한 인프라가 구축되지만, 인구수가 적은 지방은 대부분 소외된다. 뉴타운이나 신도시라고 해서 개발 붐이 일어나 아파트만 잔뜩 생긴 도시 중심가에는 한 블록 걸러 학교가 생겨나는데 반해, 학생이 거의 없는 지방의 분교는 유지비용의 효율화 때문에 사라지고 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여기에 따라 세입도 점점 커지고 있는 서울에는 시민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과 문화예술 향유기회가 늘어나지만, 지방은 ‘효율성’을 위해 이유야 어쨌든 지방 행정 체제가 하나로 묶이게 된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가 말하듯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논리는 효율성의 이름으로 절대로 ‘다수’가 될 수 없는 지방 사람들에게 이렇듯 아프게 다가온다.

얼마 전 통영의 한 초등학생이 피살된 채로 발견된 일로, 한동안 떠들썩하던 통영과 고성의 행정구역 통합 찬반문제가 다소 묻혀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어린 여자아이의 안타까운 죽음을 동정하고, 피의자의 잔인성에 분노하며, 성범죄자에 대한 허술한 관리체계를 비판한다. 죽은 학생이 하교길에 히치하이킹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도서지역의 열악한 교통편에 대해서 성토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닌가. 어디에나 죽음이 있고 어디에나 성범죄자가 있겠지만, 지방 도시에서는 그러한 거대 논리보다는 이러한 비극을 만들어낸 지역 학생을 보호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얼마 뒤면 이 일도 결국은 다른 거대한 이슈들에 묻혀버릴 것이다. ‘효율성’의 이름으로 아이들이 집 가까운 곳에서 다닐 수 있는 학교를 통합해버렸듯, 행정구역도 통합되어 버릴 것이다.

21세기는 세계화가 지향점이 아닌 피부에 와 닿는 시대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남은 지향점은 세계화를 위한 ‘지역화(Localization)’이다. 효율성의 이름으로 지역성(Locality)이 중앙의 논리에 의해 억눌리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이제 지역과 그 곳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수학적인 의미에서 효율성의 논리는 분명히 아니다. 중앙과 다수의 이름으로 지역을 흡수하고 통합하는 것이 바로 양적인 효율성이다. 그러나 질적인 의미에서 개개인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누가 그것을 감히 효율이라고 부를 것인가.

이번에 거제 지역에서는 문화와 예술, 교육 단체와 기관을 모두 아우르는 협의체가 곧 출범한다. 효율성의 논리대로라면, 이러한 지역 협의체는 분명 낭비다. 지금껏 우리가 그래왔듯 ‘중앙’의 논리를 따라가는 피라미드의 말단으로써 기능하는 것이 양적인 효율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문화와 예술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교육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양적인 효율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바로 질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삶과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지역의 문화를 융성시키는 것은, 지역의 예술과 지역에 사는 학생들을 위한 질 높은 교육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낭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중앙을 따라가기만 하는 지방 도시가 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중앙이 따라가고 싶어하는 지방 도시가 되는 것이 나을까. 우리는 효율성을 버리고 협의체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협의체를 통해서 질적인 효율성과 경제성을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서 지방이라는 마이너리티를 극복하며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효율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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