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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은 통영이 자랑하는 시인이다.중앙시장 앞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유준수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이 유치진이고 차남이 유치환이다.극작가 유치진은 수준 높은 희곡 작품을 쓰고 연극인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등 한국 연극의 새로운 장을 연개척자이다.통영에서도 극단을 창단해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을 공연했다.유치진으로 인해 통영은 '신연극의 발상지'라고 불린다.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유치진은 일본에 부역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그래서 통영에서는 유치진의 이름이 철저히 지워졌다. 예술적 업적을 기리며 세우려던 흉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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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9.01.03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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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프랑스의 소설가를 잘 알지 못하지만, ‘별’을 쓴 알퐁스 도데는 대부분 알고 있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별’이 주는 목가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며 프랑스의 분위기를 각인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이나 덴마크 사람들에게 한국의 작가는 ‘김용익’이다.어쩌면 그들에게는 김용익이 박경리나 이원수보다도 더 유명한(?) 아동문학가이며 소설가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이 동양의 신비를 물씬 안고 중등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백정의 자식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여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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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9.01.0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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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피난민인 이중섭은 1956년에 짧은 생을 등졌다.부산, 제주, 통영을 떠돌며 너무 가난해 은지에 그림을 그린이 천재화가는 통영 시절에 가장 많은 유화작품을 남겼다. 1951년 12월, 11개월의 서귀포 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간 이중섭은 은지화를 그리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다.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까지 이르자, 일본인 아내 마사코는 아이들과 함께 일본인 수용소로 들어갔다.그리고 1952년 7월, 3차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친정으로 돌아갔다.가족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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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9.01.0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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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부근에서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국토의 남쪽 끝 통영에서는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가 문을 열었다.1945년부터 있던 나전칠기제작소를 도립으로 운영하면서 체계를 갖춘 것이다.이곳에서는 세계가 인정한 장인 김봉룡 선생이 나전칠기를 가르치고 함경북도 출신의 염색공예가 유강렬 선생이 도안과 제도를 가르쳤다.옻칠기법은 안용호, 데생은 장윤성, 건칠은 강창규 등 쟁쟁한 교사진을 둔 이 양성소에서는 10여 년간 100여 명의 장인을 배출했다.양성봉 경상남도 도지사가 소장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책임자는 부소장인 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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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9.01.0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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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의 문화는 12공방에서 꽃을 피운다.처음 12공방은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기 위한 곳이었다.한산도에 있었던 병영에서 만든 칼이 아산현충사에 남아 있는 걸 보면, 적과 결전을 치루는 전쟁 못지않게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전쟁도 치열했던 것을 알 수 있다.전쟁이 끝난 뒤에 12공방은 모든 수공예의 원산지가 되었다.공방의 수가 12개를 넘는데도, 통제영의 공방은 12공방이라 불리며 모든 것이다 있는 공방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조선시대 ‘통영’이라는 이름은 그자체가 명품 브랜드였다.흥선대원군이 일부러 사람을 통영까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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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2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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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토양은 정통 궁중음악을 들으며 자란 통영의 아들들을동서양의 음악을 융화시킨 세계적인 음악가로 만들었다.급변하던 근대, 통영은 문화의 변방이 아니었다동양과 서양의 음악을 융화하는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음악가가 통영에 는 둘이나 있다. 한 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윤이상이다.다른 한 분은 윤이상과 동급생이었던 정윤주다. 동피랑에 살았던 정윤주(1918~1997)는 어린 시절 세병관 학교 가는 길에 권번 앞을 지나면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귀기울여 들었다고 한다. 권번의 음악이 어린 정윤주의 마음에 동양음악의 바탕을 만들었고, 클래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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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2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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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문화는 통제영에서 시작됐다.통제사와 함께 내려온 의복, 요리, 음악, 예술, 공연 등의 갖가지 문화가,통제영 이후 이땅에 정착하게 된 통영 사람들에 의해 전수됐다. 조선의 예인 양성기관 취고수청, 신청, 교방청통제영 산하에는 각종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는 취고수청과 관기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는 교방청이 있었다. 또 관의 제례 같은 무속을 담당하는 신청도 있었다.우리의 춤과 문화를 전승하게 된 세습무와 기생이 있었던 신청과 교방청은 물론, 악기 연주자를 양성한 취고수청은 말하자면, 조선시대 예인 교습기관이었던 것이다. 취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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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26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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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 호주 선교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95년이다.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지역을 선교하던 호주 장로교 선교회 소속의 아담슨(한국 이름 손안로) 선교사가 첫발을 디딘 이래, 1941년까지 24명의 호주 선교사가 들어왔다. 그중 여성이 14명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 교육에 헌신했다. 호주의 선교사들은 1902년 욕지도에 논골교회(현 욕지교회)를 세웠고, 1905년 문화동에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를 세웠다.근대 개화기의 교회는 ‘기독교’ 이상의 의미를 갖는 곳이었다.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일제의 야욕 속에서 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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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2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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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만 외치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일까?”3월 13일의 통영만세운동 이후에도 통영의 젊은이들은 세 번의 만세운동을 벌였다.그러나 매번 일제의 총칼에 아까운 인명만 희생되고 감옥에 갇혔을 뿐, 얻은 게 없었다.항일운동 거점, 청년자립의 모태 통영청년회관 “그래,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자.” 1919년, 34명의 청년들은 ‘통영청년단’을 만들었다.송정택의 사랑방에서 통영의 청소년들을 위한 일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통영청년단은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들을 위한 강습소를 열었다.제대로 된 교실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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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8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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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선교사네 집에는호주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따로 또 있었다.탱자나무 울 사이로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김춘수 ‘처용단장’ 1부 3 中- 김춘수는 “내 시에는 가끔 이런 따위 철을 어긴 장면들이 나온다.”며, 그것은 “댓살 났을 때의 유치원 시절의 체험이 불쑥불쑥 되살아났기”때문이라고 말한다.천석꾼 집 도련님이었던 김춘수가 어린시절 머슴의 등에 업혀 다녔던 진명유치원은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이 세운 통영 최초의 유치원이었다. 어린 김춘수는 호주 선교사들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를 일찍 알았다.1919년 3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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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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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는 행정권, 사법권, 재정권, 군권을 지닌 막강한 권력자였다.삼남 바닷가 70개 고을은 모두 통제사의 지배 안에 있었다.통제사의 권한은 화폐 주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세종 초의 기록을 보면 경기도 양근군(지금의 양평군)에 주전소를 설치하였으나 구리와 노동력이 부족해 폐지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기술과 물자 없이 주전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통제영은 무기를 만들어 쓸 기술력과 재력을 갖고 있었다.영조 정미년(1727년)의 기록을 보면 전국에서 50만 냥을 주조할 방침을 세웠다가 취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이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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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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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서 천릿길이 떨어져 있었지만 통영은 한양과 직접 연결되는 도시였다.종2품의 통제사가 한양에서 수많은 수행인들을 데리고 내려왔기 때문에 한양의 문화가 그대로 통영에 전해졌다.풍악을 울리는 악대가 통제사의 행렬을 이끌었고 손맛 좋은 요리사들이 행렬 속에 있었다.통제사의 임기는 2년이었지만 1년을 못 채우는 통제사도 많았다.300년 통제영 역사에 208대의 통제사가 있었으니 평균 1년 반의 임기를 지낸 셈이다.그러니 통제사가 바뀔 때마다 통영에는 새로운 한양의 문화가 그대로 유입됐다.7대 이운룡 통제사의 기록을 보면, 새로 임명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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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5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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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 종전 8년만에 3만 군사도시로전란 후 6년, 두룡포기사비의 표현대로 “한낱 바닷가의 어촌으로서 개펄 지역이며 거친 덤불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두룡포에 조선 수군의 핵심인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됐다.빈들과 같던 작은 어촌에 통영이라는 조선의 군사 신도시가 탄생한 것이다.통영의 탄생사를 적고 있는 두룡포기사비는 “서쪽으로는 착량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어안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 깊숙하면서도 구석지지 않고 얕으면서도 노출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뛰어난 곳이요 국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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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5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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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의 탄생1604년, ‘우두머리 용’이라는 뜻의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이설됐다.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 만, 통제영이 여수, 거제로 옮겨다니던 끝이다.통제영이 옮겨다녔다기보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4대 통제사가 된 이시언 장군이 전라좌수사를 겸할 때는 여수가, 경상우수사를 겸할 때는 거제가 통제사의 영지였다. 6대 통제사 이경준이 빈들과 다름없던 작은 어촌 두룡포에 통제영을 설치함으로써, 통영이라는 군사 신도시가 생겼다.통영성은 가운데 통제영을 두고 쌓은 둘레 약 3.6km의 큰 규모의 성이다.통영성과 내륙을 연결하는 북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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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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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영을 중심에 두고 감싸안듯 지어진 최초의 통영성은동피랑의 동문과 서피랑의 서문, 중앙시장 앞에 있던 남문과 북포루의 북문을 경계로 한다.통영의 정수, 통영의 알맹이인 중앙동에는 통제사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통영인의 보석 같은 사연이 가득하다.통제영을 가로지르는 서문로와 동문로를 가로로 따라가며 첫번째 중앙동 이야기를 풀어본다. 호주 선교사의 집호주의 선교사들은 1895년부터 통영에 들어와 충무교회를 비롯해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진명학원을 통해 통영 최초로 근대교육을 했다. 진명유치원과 통영 최초의 병원을 운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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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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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속 신문화를 주도한다"두 가지를 보고 병원을 하기로 결심했어요.하나는 고압산소치료기이고, 하나는 구도심의 이 위치이지요."올해 3월부터 '신세계로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승수 원장(54)은 지난 3월 정량동 세계로병원을 인수했다.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고 간판을 바꿔달았다. 잠수함처럼 생긴 챔버에 들어가 산소호흡기를 쓰고 1시간 동안 온몸에 100% 산소를 채우는 방법으로 잠수병이나 가스중독을 치료하는 고압산소치료법은 최근 염증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일반인들에게까지 인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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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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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없는 곳에 사는 것은 답답하다.바다가 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고향 바다는 너무나 멀리에 있다. 통영 앞바다-한려수도로 트인 그 바다는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있다.그 뉘앙스는 내 시가 그동안 어떻게 변화해왔든 그 바닥에 깔린 표정이 되고 있다.”동호동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통영에서 보낸 김춘수는 자신의 시가 통영의 바다에서 나왔다고 말한다.지금 그의 집은 바다에서 한참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춘수가 태어났을 때는 그 집 앞이 항북목이라 하여 남망산을 사이에 두고 강구안 바다와 연결된 잘록한 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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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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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망산조각공원 남망산공원은 원래 항북목으로 연결돼 있어 마치 강구에 떠 있는 섬처럼 보였다.이곳은 통영 최초의 공원인 충무공원이었으며 1940~1960년대에는 통영의 예술가들이 오르내리며 작품을 구상했던 통영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1952년 이중섭은 이곳을 소재로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과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을 남겼다.1997년 남망산공원 정비계획이 수립되어 시민문화회관과 남망산조각공원으로 조성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곳에는 일본군위안부를 기리는 정의비와 청마의 깃발 시비, 초정의 봉선화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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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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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량경로당에서 만난 81세 멘데마을 터주대감 김용애 할머니가 멘데마을 역사를 풀어놓는다.“나 어릴 때는 여가 홀빡(전부) 논이었다. 거 뭐라카노, 연뿌리 밭도 있고 미나리밭도 있고 그랬제. 나가 유영초 7회거덩. 학교 갈 때는 논두렁 타고 갔지. 학교 가는 길에 메뚜기도 잡고 그랬다.”할머니는 멘데마을서 81년 살았다. 멘데에서 태어나 결혼도 이곳 사람과 하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옆의 다른 할머니가 거든다.“메뚜기잡다 논에 빠지고 그랬다. “저가 빠졌는가베. 나는 안 빠졌다." 6.25사변 날 때 나가 열세살 먹었거던.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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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0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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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룡포는 서쪽은 판데목(掘浦)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양으로 통하고,북쪽으로는 육지에 연결되어 있어 만이 깊으면서도 구석지지 않고 얕으면서도 드러나지 않아 수륙의 형세가 국방의 요충지이다.”1604년, 이경준 통제사는 전후 통제영의 입지를 살피고 두룡포에 통제영을 두기로 했다.두룡포는 지금 한전 인근 정량동 일대다. 막상 통제영은 조금 더 서쪽에 있는 통영항 위에 이설되었지만,두룡포의 입지가 통영에 통제영을 두게 한 사실만은 두고두고 기록에 남았다. ▶이미지 클릭 크게 보기 정량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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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기자
2018.12.03 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