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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동이야기 13] 통영과 한국을 세계에 알린 김용식 김용익
김선정 기자 | 승인 2019.01.03 12:19

 

우리나라 사람들은 프랑스의 소설가를 잘 알지 못하지만, ‘별’을 쓴 알퐁스 도데는 대부분 알고 있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별’이 주는 목가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며 프랑스의 분위기를 각인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이나 덴마크 사람들에게 한국의 작가는 ‘김용익’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김용익이 박경리나 이원수보다도 더 유명한(?) 아동문학가이며 소설가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이 동양의 신비를 물씬 안고 중등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통영의 3대읍장을 지낸 아버지 김채호 씨와 외교관이 된 김용식(중학생),
문학가가 된 김용익의 단란한 어린시절 가족사진

백정의 자식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여인에게 혼담 한번 제대로 못 넣어보고, 사주고 싶은 꽃신이 다 팔려갈까봐 애태우는 ‘꽃신’ 이야기는 ‘뉴요커’, ‘하퍼스 바자’, ‘뉴욕타임스’, ‘마드모아젤’ 같은 해외 유명 매체들이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극찬한 작품이다.
최근 통영의 로컬출판사 ‘남해의봄날’에서 새롭게 펴낸 김용익의 소설 ‘푸른 씨앗’에는 대장장이가 소 발굽에 징을 박고, 소싸움을 벌이던 통영 장날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파란 눈인 천복이가 잃어버린 황소를 통해 ‘새 눈깔’이라고 놀리던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해녀인 할머니가 표류해온 외국 선원과 결혼해 파란 눈을 물려받게 된 이력은 한 줄로 묘사됐지만, 파란 눈의 어머니와 파란 눈의 천복이가 온통 까만 눈인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넘치지 않게 잘 묘사됐다.
이 작품은 1966년에 독일 우수도서에 선정되고 덴마크 교과서 수록되는가 하면, 1967년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수여한 청소년명예상을 받았다.
덴마크와 미국 학생들이 김용익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동양 단일민족인 어느 나라의 풍경은 바로 통영의 소학교, 통영의 장날, 통영의 어린이들 모습인 것이다.

 

선생은 스물여덟살 때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영문과를 졸업했지만,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그 나라에서 인정받는 문학가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선생은 하루 세 시간씩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글을 썼다고 한다.
출판사로 원고를 보내고 퇴짜맞는 세월이 8년, 누구보다 한국적 감수성을 지닌 선생이 ‘영어’라는 전혀 다른 감수성의 언어로 글을 쓰는 수행의 세월이었다.
국내의 유수한 작가들이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많이 썼지만, 영어로 번역되면서 그 가치가 반감되었던 우리나라 문단의 현실을 생각할 때, 영어로 소설을 쓰는 선생의 작품은 정직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김용익 선생은 192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통영보통학교(현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의 중앙중학을 거쳐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48년 도미하여 남플로리다대학과 켄터키대학, 아이오아대학원에서 소설창작을 공부했다.
1956년 비로소 첫 책을 출판한 선생은 1957년부터 1964년까지 고려대, 이화여대의 영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한국의 달’, ‘행복의 계절’, ‘꽃신’ 등을 출판했다.
196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여러 대학에서 소설창작을 강의한 선생은 1969년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
1976년에는 미국 국가문학지원금을 받았으며 1981년과 1983년에는 펜실베니아주 문학지원금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영어로 먼저 쓰인 김용익의 저서들

김용익 선생은 서울과 일본에서도 살고, 미국에서 오래 살았지만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통영의 자연, 통영의 감성이 자신의 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미국, 유럽의 하늘도 보고 산길도 걸었으나 고국 하늘, 고향 길이 늘 그리웠다. 돌과 풀 사이 쇠똥에 발이 빠졌던 그 골목길이 그리웠다.
나의 이야기는 내 밑바닥에 깔린 고향에 대한 시감(詩感)이 원천이니 그것은 바로 나의 노래다.” 1994년 고려대 초빙교수로 귀국했다가 이듬해 4월 11일 지병인 심장병으로 별세, 통영시 용남면 오촌마을에 안장됐다.

 

김용익의 형 김용식은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린 최초의 외교가이다.
88올림픽을 유치한 외교관 김용식은 통영공립보통학교와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법학부를 나왔다.
1939년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해방후 3년간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9년 홍콩 주재 영사로 발탁된 이래, 한국의 독립과 정부 수립, 한국전쟁, 세계적인 냉전, 남북한의 첨예한대치와 경쟁적인 대결외교가 일어났던 33년간 외교관과 행정가를 지냈다.
1963년에 외무부장관이 되었고, 이어유엔 대사, 국토통일원장관을 역임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김선정 기자  64440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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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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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랑 2019-01-06 12:26:35

    진짜 너무많다.
    많음의 문제, 배부름의 문제, 분명 문제가 생길텐데 우찌 해야할지 고민 많이 해야 한다.
    내 생각엔 그 중에 우선을 정해서 집중해서 발굴정리 해놓고 다음을 역시 정리 하고 돌아가면서 발굴정리가 답일것 같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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