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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동 이야기 3] 궁궐보다 먼저 지어진 통제영
김선정 기자 | 승인 2018.12.15 13:37

임진란 종전 8년만에 3만 군사도시로

전란 후 6년, 두룡포기사비의 표현대로 “한낱 바닷가의 어촌으로서 개펄 지역이며 거친 덤불로 여우와 토끼가 뛰놀던” 두룡포에 조선 수군의 핵심인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됐다.
빈들과 같던 작은 어촌에 통영이라는 조선의 군사 신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통영의 탄생사를 적고 있는 두룡포기사비는 “서쪽으로는 착량을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견내량을 끌어안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큰바다와 통하고 북쪽으로는 육지와 이어져 있어, 깊숙하면서도 구석지지 않고 얕으면서도 노출되지 않아 진실로 수륙의 형세가 뛰어난 곳이요 국방의 요충지이다.”라고 통영의 지형을 설명한다.
“하늘이 이러한 요새를 마련해 놓고 때를 기다렸다.”고 평하기도 한다.
통제영이 설치된 1604년은 임진왜란의 상처가 조선 땅 곳곳에 깊숙이 남아 있던 가난하고 힘겨운 시절이었다. 임금조차 제대로 된 궁궐에서 살지 못하던 때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전란중에 불타버렸다.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는 돌아갈 궁궐이 없어, 월산대군의 옛집에 살았다. 나중에 덕수궁으로 모습을 갖춰가지만, 그 당시 선조는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린 월산대군의 집에서 겨우 담장만 쌓고 정무를 보았다.
궁궐에 있어야 할 관청도 인근 민가에 두어야 할 만큼 조선의 조정은 가난하고 힘이 없었다. 정릉동 행궁이 덕수궁으로 궁궐의 모습을 갖춘 때가 1607년인 것을 생각하면 1604년 통제영 설치는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통제영은 객사인 세병관을 중심으로 운주당, 백화당, 경무당, 내아, 병고, 12공방, 중영, 중영내아, 망일루 등 100여 동의 관아건물을 포함한 장중한 요새였다.
왕궁에 비견할 만한 신도시를 전란이후 극심한 재정난 속에서 건설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조선의 조정에서는 “어디에 통제영을 둘까?” 하는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본이 다시 부산으로 침공해 올 때를 대비해 부산의 군력을 강화할까 하다가 “어찌 적이 부산으로만 오겠는가?” 하며 영남, 호남 해안의 적임지를 찾는 논의가 몇 번이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이런 숙고 끝에 찾아낸 곳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음력으로 9월 9일, 통영은 생일이 있는 특별한 도시다.
통제영이 설치된 뒤, 군사들뿐 아니라 군사행정에 능통한 문관들, 필요한 물자를 만들기 위한 장인들이 식솔들과 함께 이주해 왔다.
조선 후기의 통제영의 인구는 2만 명을 훌쩍 넘어 3만 명에 육박했는데, 이는 조선 제2도시 평양과 비슷한 규모였다.

김선정 기자  64440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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