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만 외치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일까?”
3월 13일의 통영만세운동 이후에도 통영의 젊은이들은 세 번의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매번 일제의 총칼에 아까운 인명만 희생되고 감옥에 갇혔을 뿐, 얻은 게 없었다.
항일운동 거점, 청년자립의 모태 통영청년회관 “그래,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자.” 1919년, 34명의 청년들은 ‘통영청년단’을 만들었다.
송정택의 사랑방에서 통영의 청소년들을 위한 일을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통영청년단은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들을 위한 강습소를 열었다.
제대로 된 교실도 없이 충렬사와 유치원 건물을 전전하며 다녔지만, 꿈이 있어서 지치지 않았다.
통영청년단이 청년회관을 짓기로 뜻을 모으자, 지방유지인 이영재가 대화정 남새밭을 희사했다.  “그렇다면 우린 하루씩 노동을 해서 보태겠어요.”
청년단은 건축공사에 노동을 분담하며 회원들을 확충해 나갔다.
일제의 교묘한 방해가 계속됐지만, 지방유지들의 후원을 독려해 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호주 선교사집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을 불러 공사를 시작했다.
3대 단장인 임철규와 동생 임창규형제가 문중의 전답을 담보로 건축비 전액을 빌려 결국 5년 만인 1923년 11월 회관을 완공했다.
그로부터10여 년간, 이 건물은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쓰였다.
이것을 일제가 가만히 두고 볼리 없었다. 일제는 온갖 박해를 하다가 1931년에 강제로 해산해 버렸다.
이후 회관의 관리와 소유권 분쟁이 일자, 임철규는 아예 회관과 부지를 통영읍에 기부해 버렸다. 1945년 3월 30일의 일이다.
2002년 5월 31일,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지금 이 건물은 충무고등공민학교, 통영사연구회, 통영서도회가 사용하고 있다. 통영문화원이 새청사로 이전하기까지는 문화원 건물로도 활용됐다.
충무고등공민학교는 전국에 하나 남은 야학이다.
만학의 꿈을 꾸는 장년과 학교밖 청소년들이 매일 저녁 공부를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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