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시대 이후 창의적 인재의 롤모델을 제시하라면 전구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과 애플컴퓨터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를 꼽을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이 둘의 출생지는 미국이다.

교과서에 수록돼 대부분이 알고 있는 에디슨은 세기적인 발명품 전구 등 특허수만도 1천여 종이 넘어 발명왕이라 부른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해 주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다. 집안이 가난했기에 12세 때 철도에서 신문과 과자를 팔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화물차 안으로 실험실을 옮겨 실험을 했다. 신문팔이던 하던 어느 해 기차 실험실 안에서 화재를 일으켜 차장에게 얻어맞은 것이 청각장애를 일으키게 됐고, 그 후부터 사람과의 관계를 끊고 연구에만 몰두했다. 청각장애라는 장애가 연구를 더욱 매진케 하는 촉진제가 된 셈이다.

15세 때 패레데이의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주식상장표시기, 인자전신기, 이중전신기, 탄소전화기, 축음기, 백열전구, 영사기 등을 계속 발명했다. 1차 세계대전 중 잠시 사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종전 후 다시 웨스트오렌지에 있는 연구소로 돌아와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에디슨이 만든 에디슨종합전기회사와 나중 톰슨 휴스톤사가 1892년 합병해 GE가 만들어졌다. 에디슨이 초창기에 운영한 사업인 조명, 운송, 산업제품, 송전, 의료장비 등은 현재까지 GE 사업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에디슨은 대학의 강의를 경멸했다.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맞춰 가고 있으며 독창적인 사고를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라고 했으며, “나는 발명을 계속하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한 돈을 얻기 위해 언제나 발명을 한다.”고 했듯 평생 연구에 모든 것을 바쳤다.

스티브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비행청소년이었다. 그의 인생의 전환점은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 전기공학 키트를 얻으면서부터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됐다. 대학에 진학한 그는 학비부담 때문에 그만뒀다.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동업으로 애플퓨터를 설립했고 신문사 등에서 편집용으로 쓰는 매킨토시가 성공을 거뒀다. 1985년 경영일선에 물러났으나 컴퓨터그랙픽사를 세워 성공했으며, 나중에 애플사에 합병되면서 애플사 최고경영자로 돌아와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낸 애플사를 한 해만 4억 달러에 가까운 흑자회사로 만들었다. 애플사는 현재 세계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과 특허소송을 하며, 삼성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에디슨과 스티브 잡스를 보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 도전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자는 취지에서 지난 2008년 도입된 입학사정관제도의 범위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

최근 도출된 자기소개서 대필이나 허위서류작성 등이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지만, 전인적인 인재를 선발하는데 있어 합리적인 제도로 꼽히고 있다. 부모나 교사의 조력을 받아서 쓰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나 소개서 자체를 허위로 기재하는 것은 큰 문제일 수 있다. 부모나 교사가 이를 방조하거나 조력하는 것은 결코 학생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요즘 학교는 체험, 봉사활동, 동아리활동 등 다양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왠지 입학사정관제에 맞춰 실시하는 맞춤식 교육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수학올림피아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도, 대학에 가면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학력이 떨어지고,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부분에 대해 교육당국은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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