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항북동(현 동호동) 출신으로 일점강점기인 1920년대 북만주 등에서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한 허승완 장군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김해 허씨 진사공파 허 은의 아들로 1894년 태어나 3.1운동 열사 허장완의 친형이다.

그는 1919년 4월 김청봉 등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지휘했으며, 1년 2개월간 군세가 확장돼 6개 대대의 큰 규모로 편성하고 활동무대를 연변의 화룡, 왕칭, 훈춘 지역까지 확대했다.

1923년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고려혁명군을 조직해 의병장 출신 기규식과고평, 이범석 등과 활동했으며, 고려혁명군에서 북간도를 근거지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헌병대장 직함을 갖고 있었다.

한러연합부대가 1920년 3월 아므르강 하구 태평양 연안의 항구인 니클라예프스크 주둔 일본군을 공격해 전멸시킨 ‘니항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은 연해주 일대 한인사회를 유린하는 ‘4월참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일본군의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러시아의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하게 되었고, 이때 상화간의 갈등으로 인해 러시아군이 한인무장단체를 공격해 900여명이 사살되는 ‘자유시참변’이 발생했다.

물론 청산리대첩으로 튼 피해를 입은 일본군의 항일무장단체에 대한 탄압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허승완은 다행스럽게 자유시참변을 면할 수 있었으며, 러시아 백군과 적군이 전투할 당시 적군의 용병이 돼 상당한 공적을 올렸다. 이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소하령의 우리의 면장격인 소비에트회장이 돼 월급 30원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이처럼 일본이라는 타도대상을 위해 함께 연해주를 중심으로 싸웠던 독립투사들은 자연스럽게 러시아의 영역안에 편입됐으며, 허승완도 같은 상황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정예부대는 10만 정도가 항일무장 투쟁을 경험한 있다고 한다.

이처럼 허승완 장군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그를 조명하는데도 한계가 있지만, 좌익인사라고 해서 그동안 제대로 평가를 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좌익인사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는 있지만, 미진한 부분이 사실이다.

오늘의 역사가 내일의 역사가 되는 것이 역사의 수레바퀴라면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간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채흥기 기자 64440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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