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린 도독은 이순신 장군의 진정한 벗이었다

▲ 완도 고금도 충무사에 있는 이순신 영정<사진 채흥기 기자>


명 신종 황제에게 서한 “이순신 뛰어난 인물, 명 장수로 삼아달라”
이순신 죽음 예감, “제갈공명 비책써라” 노량해전 앞두고 편지
이순신 장군 전사하자  ‘통분’, 완도 고금도에 83일 동안 장사 지내

진린 도독. 명나라 장수였던 그가 새롭게 부각된 건 2014년 7월 4일 중국 시진핑 주석이 서울대에서 ‘한·중이 힘을 합쳐 미래를 개척하고 아시아의 진흥과 번영을 같이하자’라는 제목으로 초청 특강을 통해 조선을 침략한 일본을 무찌르기 위해 정유재란에 참여한 명나라 장수 진린 도독과 등자룡을 언급하고, 진린 도독의 후손들은 오늘까지 한국에 살고 있다”고 밝히면서다. 통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진린 도독의 후손들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올해 한산대첩축제가 오는 8월12일부터 16일까지 5일간 개최된다. 이에 앞서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 그리고 그의 후손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기 위해 ①이순신과 진린 도독-(가) ②이순신과 진린 도독-(나) ③완도 고금도 충무사 ④진린의 후손 집성촌 해남 황조마을 ⑤광동진씨 종친회 진방식 회장 인터뷰 등 5회 기획시리즈로 연재한다.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은 진린 도독의 후손들이 60여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곳이다. 그들은 진린의 고향이 광동성이므로 광동진씨라고 칭하며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는 진방식(80, 전 방송통신대 교수)씨는 한산대첩기념사업회 이사이기도 하다. 그는 진린 도독의 14대손이다.

진린(陳璘, 1543년 ~ 1607년)은 중국 광동 출신의 무관으로 1562년 명나라 관직에 출사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도독으로 전함 500척과 수군 등 병력 2만 여명을 끌고 조선을 도우러 왔다. 순천왜교성 전투, 노량해전, 그리고 임진란 마지막 전투인 남해왜성 함락작전을 지휘해 일본 수군을 초토화 시켰다.

진린 도독은 처음엔 상국의 위세를 부리는 등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해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해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된다. 그는 명나라 황제 신종(만력제)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명나라 장군으로 삼을 것을 청했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는 서한문의 앞 부분이다. 이를 본 신종은 명나라 도독으로 삼는 벼슬과 함께 현재 충렬사에 보관(시립박물관에 위탁 보관)돼 있는 보물 440호 팔사품(八賜品, 진린 도독의 도장,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을 하사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장수로서 이순신과 진린 도독의 애틋한 정이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의 휘하 송희립에 의해 왜군에 포위된 진린 도독이 목숨을 구한 것.

전란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됐다. 진린의 태생지인 광동성 소관시 옹원현(翁源縣) 주파진에 있는 문중과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옹원현에서 태어나 운부시 윈푸(雲浮)시 윈안(雲安)구 육도진 등 에서 생활했다.

해남의 황조마을 후손들은 2년에 한 번씩 한식날엔 본토 진씨들이 제사에 참석하며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다. 또한 통영시는 지난 3월 원푸시와 우호도시 양해각서를 체결한데 이어 오는 10월 석제문화축제 때 본 계약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과 성격이 유사한 면이 있다. 광동진씨 종친회 진방식 회장에 따르면, 진린은 매우 강직하고 정의로워 뇌물 등과는 관계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상관에 의해 두 번이나 뇌물을 받았다는 거짓 고변에 의해 파직됐다. 이순신 장군 역시 그를 시기한 조정 대신들에 의해 파직돼 백의종군 했으며, 변방에 있을 때도 강직함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들은 전남 완도군 고금도 묘당도에서 첫 대면을 했다. 이전 이순신은 1597년(선조 30년) 8월 백의종군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 임명돼 13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후 군산 선유도에서 다시 팔금도에 잠시 있다가 목포 앞 고하도에 진을 쳤으며, 그 해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1598년(선조 31년) 2월17일 수군 8,000여명을 거느리고 완도 고금도 덕동리로 진을 옮겼다. 당시 나이 53세였다. 충무전서행록에 따르면 고금도는 견고한 요충지로 섬이 크고 기름진 농토가 많아서 식량보급이 용이했다.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수군을 늘리는 한편 군사력을 기르기 위해 조수와 수전에 익숙한 완도 등 각 진의 장정들을 모집해 초유의 수군을 편성했다.

진린은 1597년 10월 500여척을 거느리고 충청도 당진에 도착했다. 다음해 선조와 대신들은 전라도에 가는 진린을 전송했으며, 1598년 7월16일 고금도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그를 융숭하게 영접했으나 술잔을 집어 던지는 등 고압적인 자세를 했다. 이에 이순신은, “장군은 명나라 대장으로 이곳에 와 왜적을 토벌하는 일인데, 우리 진중의 승첩이 장군의 승첩이 아닌가. 우리가 잡은 적의 머리를 장군께 드릴테니 본국의 황제께 승첩을 아뢰십시오” 이말을 들은 명나라 군사들은 ‘과연 훌륭한 장군이다’라고 탄복했다 한다.

진린이 진을 친 곳은 묘당도이며, 이순신은 200m 정도 거리에 있는 덕동에 진을 치고 있었다. 여하튼 초반에 갈등을 빚었으나 나중에 이순신의 인품됨에 감복해 그를 진정 존경하게 된다.

사진∙취재 채흥기 기자

▲ 진린도독 영정


▲ 팔사품충렬사에 전시돼 있는 팔사품. 모조품으로 진품은 통영시립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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