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이 끝나면 왕과 대신들은 이순신을 해하려 할 것”

▲ 명나라 수순 함대. 진린 도독의 함대는 전함 500척, 수군 5,000명, 해병 및 보병 1만 3,900명이 전남 완도 고금도에 도착하는 장면. 포등 병기와 군량미 2만여 석을 싣고 왔다.

이순신은 뛰어난 장수, 명 황제에 장수로 삼아 요동 방비 건의
여수 묘도에 도독마을 지명, 진린 27일간 묘도에 진 성터 등 존재

 다시 진린이 명 황제 신종에게 보낸 편지를 끝까지 읽어보자.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해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했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해 결국에는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국왕에게 충의를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중략)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그가 이순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편지에 절절하게 배어있다. 그의 인간 됨됨이를 볼 수 있는 한 사례가 있다. 한번은 명나라 수군들이 우리 민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이순신은 자기의 짐을 모두 배에 옮겨 싣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린은 까닭은 물었다. 이에 이순신은, “우리는 귀국을 하늘과 같이 믿었는데, 도리어 약탈을 하므로 모두 여기를 떠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진린은 이순신을 만류하고 짐도 배에서 내리도록 애걸복걸 했다. 이순신은 “귀국의 군사의 잘못을 내가 막을 수 있는 권한을 내게 주신다면 서로 보전할 수 있겠습니다” 했다. 진린은 두말없이 승낙했다. 그 이후 명나라 수군의 행패는 없었다. 이는 현재 징비록에서 나오는 명나라 장군들과 사뭇 다른 행동이다. 처음엔 상국으로서 위세를 떨쳤지만, 후에 행동이 달라진데는 진린 인간성 자체가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진린은 이순신과 교류를 통해 당시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 노량해전 전투 중 이순신의 죽음을 직감했으며, 이순신이 죽자 그의 시신을 고금도 묘당도에 83일 동안 안치하고 제문을 직접 지어 장례를 지냈다. 그 기간 동안 몹시 통분하며 슬퍼했다 한다. 진린은 이순신보다 2살이 위였다.

노량해전이 시작되기 전 명나라 육군제독 유정은 협상을 통해 왜장 소서행장의 청을 받아들어 퇴로를 열어준다. 이에 이순신이 적의 원군이 올 것을 예감하며, 진린에게 같이 행동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진린은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가 밤에 하늘의 형상을 보고 인사를 살피는데 동쪽의 대장별이 빛을 잃어가니 공에게 화가 미치는 것이 멀지 않은 듯 합니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르겠소이까? 어찌 무후(제갈공명)의 예방법을 쓰지 않습니까?” 하자, 이순신은 “나는 충성이 무후에 미치지 못하고, 덕망도 무후에 미치지 못하고, 재주도 무후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무후에 미치지 못하니, 비록 무후의 비법을 쓴다 해도 하늘이 어찌 응하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이순신은 왜군을 완전히 소탕하겠다는 의지였다. 진린 역시 이에 공감했다. 이 답장을 받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큰 화가 닥칠 것을 예상했다. 이 편지는 중국 청산도에 있는 진린의 비문에 있는 글로 충무공전서 첫머리에 실려 있다.

한편, 여수 묘도는 광양만의 중앙에 자리 잡은 섬으로 진린에 관련된 지명과 유적이 남아 있다. 도독마을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진린은 1598년(선조 31) 7월 16일 당시 전라 수군 본영이었던 완도 고금도에 도착해 덕동에서 조금 떨어진 묘당도에 진을 쳤으며, 9월 21일, 진린 도독은 수군 5천 명과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고금도를 출발해 순천 왜성에 갇혀 있던 왜적을 섬멸하려고 묘도에 진을 쳤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9월18일 사망해 왜군들은 철군을 서두르던 시기다. 진린은 이틀 동안 군장을 수습하고 나서 곧바로 장도에 비축한 적의 군량을 불살랐고 왜성을 공격했다. 11월 11일 다시 묘도에 진을 친 뒤 노량해전에 참전한다. 이로써 진린이 묘도에 진을 친 기간은 27일이 되는데 묘도의 도독마을이 바로 그 흔적의 터이다.

여천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도독마을은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진린 장군의 수군이 진을 친 데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도 진린의 직함을 따라 도독포, 도독개라고 불리며 그때 쌓은 산성이 남아 있다. 주위에는 성곽과 포대를 설치했던 흔적도 있다. 임진왜란 때 지원병을 거느리고 주둔했던 격전지를 마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계속>

▲ 진린 도독이 정유재란 당시인 1598년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정왜기공도. 그린이는 명나라 수군을 따라 온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 최근 광동진씨 후손들에 의해 중국 광동성 운안현 육도진 남향촌에 건립한 진린 도독 전승기념비. 글은 광동진씨 종친회 진방식 회장이 썼다.


▲ 묘도 전경


▲ 터만 남았는 묘도산성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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