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간절히도 찾으시거늘 어찌 끝내 사양하는가”

▲ 이순신 영전이 모셔진 정전의 충무사

진린 도독 월송대에 83일간 이순신 시신 안치 장례
당초대로 동무에 진린, 서무에 이순신 사당 복원을

강진군 마량에서 한참을 가다보면 완도 고금도가 나오는데, 다리가 연결돼 있다. 다시 섬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금면 소재지를 지나 묘당도라는 섬이 나온다. 현재는 육지와 연결돼 있다. 이곳에 충무사(사진)가 있다. 이순신 초상이 있는 정전, 우수영전진도첩, 관왕묘비, 월송대, 외삼문 등이 있다.

이곳은 진린 도독이 군신 관왕(삼국지의 관운장)을 모시기 위해 건립됐다. 현종 7년(1666년) 수군절도사 유비연이 중수하고, 동무에는 진린을, 서무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암자 옥천사를 지어 천휘 스님으로 하여금 사당을 관리토록 했다. 현종 때는 경칩과 상강 두 차례에 걸쳐 영암, 강진, 보성, 해남 등 6개 부군현 관원들이 제사를 모셨으며, 정조는 탄보묘(큰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하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군 등자룡도 함께 모시게 했다.(충무공전서)

하지만 일제 때 만족정신 말살정책에 의해 관왕상과 위패를 비롯 투구, 서적, 벽화, 현판 등 일체를 철거함에 따라 퇴락하다가 해방 후 고금도 유림이 중심이 돼 충무사 현판을 걸고 정전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으며, 1959년 이순신의 보좌관인 조방장 겸 가리포 첨사인 이영남을 동무에 모셨다. 1960년 1월 29일 사적 114호로 지정됐고, 옥천사를 분리 이전해 담장을 둘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3년 이 충무공 유적 정비 및 개발사업을 진행 서재, 외상문, 홍살문, 사정터, 인근 어란정 등 발굴 및 주차장 갖췄다.

충무사는 1598년 선조 31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본영이 있던 곳. 약산도(약산면)를 잇는 다리 입구 덕동리에는 이순신 장군의 진이 있었다. 이곳에는 전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고금도내 거주 민가가 수만호에 이르러 한산도 시대보다 10배가 되었다고 전한다. 완도군지에 따르면 이곳에서 군량미를 마련하기 위해 싸우면서 일하는 등 군농일치의 정책을 폈으며, 염전을 만들어 군염을 비축하고 바로 앞 해남도는 마름으로 섬을 둘러 마치 군량을 쌓아놓은 노적가리로 보이도록 위장했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복을 입혀 등불을 달아놓고 복병을 사방에 배치해 왜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언급한바 있듯 진린 도독은 이순신 장군과 공통점이 많았다. 이순신은 두 번의 사형위기에서 원균이 괴멸되자 다시 기용됐고, 뇌물과는 거리가 먼 강직함과 청렴성, 문장에도 탁월했다. 진린 역시 명나라 말기 만연한 뇌물과 아첨을 거절, 청렴성을 지녔다. 1548년 12월 나응학 어사의 탄핵을 받아 파직돼 고향 옹원에서 8년간 야인생활을 했으며,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때 그는 “그것(동안현) 건설은 과연 누구의 공이란 말인가”하며 어사 등 중앙관리들의 부패함을 탄식했다고 한다. 그가 복권된 건 누루하치(청나라 태조)가 동북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등 내우외환으로 나라가 어지럽기에 병법에 능한 장군이 필요에 의해서였다. 명 황제 신종은 야인생활을 하고 있는 진린을 불러들여 부총병(종2품)에 이어 전군도독부 도독(현 군편제상 대장)에 보임했다.

광동진씨족보(2002년 발간)에 따르면, 진린은 1543년 2월15일 중국 광동성 옹원현 주파진 용전촌에서 진본림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9세 때 반란을 평정하면서 무인의 길을 걷게 된다. 광동성 일대인 월동전투, 옹원 일대, 사라 및 청원 일대 등 크고 작은 반란을 수십 차례 진압해 황제로부터 여러 차례 금백을 하사받고 직위도 계속 올랐다. 동안참장사 당시 동안현의 행정조직과 성과 관아, 교량, 도로 등을 건설했는데, 이러한 도시건설을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임진란 종결 후 2달 동안 한양에 머물 때 한양의 성곽축조와 병사훈련 등 노하우를 선조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그의 두 번째 파직은 남오도 부총병으로 좌천돼 있을 당시 있었다. 정기상납을 거부하고 강직했기에 병부상서 석성의 주청에 의해 이뤄졌다. 1596년 야인으로 있을 때 광동성 남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총독 진대과의 요청에 의해 가산을 털어 용병을 이끌고 민란을 진압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복귀, 도독첨사가 됐다. 1597년 12월 제3차 동정군 경리 양호 장군이 울산성 전투에서 실패하자 왜란을 종결하기 위해 장군을 물색하던 중 “임진왜란을 평정할 장군은 병법과 왜구방어와 수전에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청렴, 강직한 진린 밖에 없습니다”라는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흠차총령수병어왜총병 관전도독부도독’으로 임명됐다.

진린은 본영 수군 5,000명, 전함 500척, 해병 및 보병 1만 3,900명과 포루투갈 해군 등 도합 2만여 명 그리고 각종 포와 군량미 2만석을 싣고 조선에 원정했다. 1598년 6월26일 선조와 만난 후 7월16일 고금도에 도착해 묘당도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사망하는 1598년 11월19일까지 5개월 동안 함께 하게 된다. 당시 이순신이 진린에게 보낸 시가 남아 있다.

“님(진도독)은 원래 용감하셔도/저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고/다만 나라 위해 죽을 뿐이라/어찌 다른 긴말이 필요하오리까”, “님께서 만일 중국 조정으로 가시고 나면 외국이라 위태함을 어이하리까./왜구들 또다시 쳐들어오고 북쪽 여진족 또한 틈을 타리다./절개를 다해 나라 은혜 갚을 뿐이고/ 성공이야 낸들 어이 안다 하리오./평생의 마음 이미 정해졌으니/이밖에 무슨 다른 말이 있아오리까.”

이에 진린 도독은, “당당하다 그리고 용감하도다/그대 없었던들 조선 운명 위태했으리./일곱 번 사로잡던 제갈량 재주/여섯 번 내어놓던 진평의 계책 갖추었네.(중략)/ 큰 절개 천 사람이 우러러 보고/높은 이름 만국이 알아주네./우리 황제 간절히도 찾으시거늘/뛰어가지 어찌 끝내 사양 하는가”

1598년 11월19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진린은 1599년 1월10일(음력) 고금도 도독부 앞뜰에서 영결식을 가졌다. 그리고 83일 동안 월송대(사진)에 시신을 안치하고 장례기간을 거쳤다.

진린은 영결식에서 <제이통제문(祭李統制文)> 읽으며 애도했다.

“아! 통제여! 먼나라 왜구가 내침해 조국이 난을 당함에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발휘해 피폐한 병졸 1려(500명 미만)를 가지고 몇 현의 좁은 땅에 의지해 왜구의 서쪽(호남) 침략을 막고 아군내부를 정비하면서 창을 베개 삼아 갑옷을 입은 채 잠을 자고 종일 쉬지도 않고 전선을 수선하고 무기를 만들었던 날이 적지 않았도다... 노량해전에서 격전이 벌어졌을 때 선봉장 통제(이순신)의 배선미와 이물(선수)이 거의 함몰될 상황에 처했음을 보고 내가 또 그대를 보위하여 적의 호구에서 벗어났도다...그래서 나는 위험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했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적의 유시(화살)에 맞아 운명할 줄 누가 알아겠는가!...우두커니 바라보며, 지난날 우리들의 정분과 일을 회상하며 감회가 여기에 이르매 흐르는 눈물 어이 막을 수 있으랴. 영령은 알지니 이 땅을 살펴보소서.”

진린은 전쟁이 끝나고 2개월 동안 한양에 머물 때 선조와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순신은 하늘의 여섯 기운을 날로 하고 땅의 오행을 이용해 작전계획을 세우는 재주가 있고, 찢어진 하늘을 꾀메고 해를 목욕시킨 공이 있다”라고 칭찬했다.

진린 그는 명나라 육군제독 유정이 순천 왜교성을 공격할 때 공격을 하지 않자 그날 밤 상륙해 유정의 본영에 들어가 장수기를 찢고 힐책했다. 유정이 왜장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협약을 맺어 후퇴하고, 왜군을 무사히 귀국토록 하자는 통문을 보자, 대노해 연락장교를 크게 꾸짖고 “수군과 육군은 책임이 다르니 각 군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소서행장의 퇴로를 막았다. 이순신과 등자룡을 좌우 선봉장으로 하고 적의 함대가 해협 중앙에 이르자 진린의 공격신호에 따라 공격이 개시돼 적함 300여척이 침몰되고 2,000여명을 죽였다. 그의 아들 진구경이 적장 이시만꼬를 생포했으나 이순신과 등자룡이 전사했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남해왜성을 공격해 소와 말 200필과 쌀 등 곡식 1만여석, 조총 등을 노획했으며, 산속으로 도망가는 왜적 2,000여명을 죽이므로써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났다. 그는 종전 후 대마도를 쳐 조선의 영토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이 겁을 먹고 이를 따르지 않았다. 한양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간 한 달 뒤 선조에게 선물을 받았는데, 돗자리와 종이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명 황제는 종군했던 감군과 어사들의 보고를 면밀히 검토해 오직 진린 도독만이 황명을 받들어 명나라의 위엄을 널리 떨쳤다고 판단, 도독동지종 1품을 하사했다. 그는 귀국 후에도 반란을 평정하는 등 활동하다가 1601년 5월 광동도독 재임 중인 64세에 사망했다. 명 황제는 그를 태자태보에 추증했다.

▲ 관우 장군에 관한 관양묘비


▲ 진린 도독이 83일 동안 시신을 안치하고 장례를 지낸 월송대


▲ 이순신 장군이 진을 친 덕동리


저작권자 © 한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