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린 손자 진조, 명나라 패망 조선 망명 해남에 터전 마련

▲ 황조별묘에서 바라 본 광동진씨 집성촌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 전경.(사진 채흥기 기자)


4대 석문씨 세상골 안착, 황조(皇朝)마을 60여 집성촌 형성
1871년 진린 도독 사당 황조별묘(皇朝別廟) 건립 4월 제사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마을은 광동진씨(廣東陳氏)의 집성촌이다. 지난달 29일 오전 황조마을 도착하니 시조인 진린 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황조별묘(皇朝別廟)에서 진경헌(61, 15대손), 진현모(54, 14대손)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황조별묘는 전남도에서 예산을 지원해 한창 내부 수리 중이었으며, 진린 도독의 영전도 교체 작업 중이었다. 황조별묘는 1871년(고종8년)에 건립돼 매년 4월 한식날 문중에서 제사를 지낸다.

진경헌씨는 농사일을 하다말고 기자를 찾아왔다. 진현모씨는 진린 도독의 영정을 표구하기 위해 읍내에 맡겼다고 말했다.

광동진씨는 진린 장군이 광동성 출신으로 그들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광동의 지명을 따른 것. 현재 광동진씨는 진린의 손자인 진조가 청나라를 탈출, 해남에 정착한 이후 약 2,000여명이 넘는 씨족들이 전국에 퍼져 살고 있으며, 황조마을에는 약 6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처음엔 90여 가구가 살았으나 30여 가구가 외지로 나갔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100호가 넘었으나 젊은이들이 도시로 가면서 많이 줄어들었다.

노량해전을 승리하고 남해왜성 전투를 끝으로 7년의 임진왜란이 종결됐으며, 진린 도독은 귀국해 64세인 1607년 광동도독 재임 중 사망했다. 이후 1644년 4월 이자성에 의해 북경이 점령당하고, 만주족인 누루하치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했으며, 그해 9월 청나라가 북경에 도읍을 정했다.

광동진씨 족보에 따르면 진린의 손자(노량해전을 참전한 진구경의 아들)인 진조는 황제가 목매 자살한 소식을 듣고, 국가 재건이 힘들다는 판단 아래 동지인 허파총과 그의 수하인 수병 5명과 같이 명나라 수군기지인 남오도를 떠났다.  전함을 타고 조선의 서남해열도를 지나 목포 앞 보화도 앞바다에서 어부 박씨의 도움을 받아 인조 22년인 1644년 8월 중추에 조부인 진린의 진이 있던 강진 고금도(현 완도군 고금도) 묘동포구에 도착해 관왕묘와 동무에 모셔진 조부 진린의 영전에 배례했다.

그는 “부모님은 북월(북광동성)에 계시는데 나 홀로 동쪽(조선)으로 와 외롭구나. 서남쪽을 응시하며 긴 한숨 쉬니 흰 구름 날아가는 곳(고향) 옹산이어라”라는 부모와 고향을 그리는 칠언시를 남겼다. 그리고 관왕묘를 관리하는 옥천사 처환 스님을 만났다.

10여일 뒤 같이 왔던 허파총 등 6인은 중국 남오도로 떠나 수군기지 남오수영에 진린 태자태보의 손자가 조선으로 망명한 사실과 그의 사향시를 전했다. 이 사실은 <남오현 문물지>에 실려 전해져 오고 있다. 진조는 경주이씨 성원의 딸과 결혼해 고금도 구석리에서 살다 해남 해리(현재 해남읍내)로 이사해 스스로 호를 사명이라 부르며 살았다. 이후 14세인 석문을 남기고 망명 16년 되던 해인 1659년 사망했다.

석문은 20여 년간 가세를 확장해 해남 산이반도의 끝 조상산 밑 <세상골>에 터를 잡고 마을 이름을 황조라고 했다. 이는 명나라 황제의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한 충신의 후예가 산다는 의미다. 그 후손이 번창함에 따라 ‘대명제’라는 서당을 세우고 자손들에게 충, 효, 예를 교육했다. 진조가 귀화한지 350여년이 흘러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수립됐으며, 마침 중국 옹원현 정부에서 북경대 상옥하 교수의 논문 『진린 장군의 후예 한국 황조리에 살고 있다』를 보고 주한 중국대사관을 통해 한국 진씨 문중에 방문을 청하는 옹원현장의 서한이 1993년 11월 진봉식에 날아들었다. 이에 진방식(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종친회장)을 단장으로 50명이 1994년 6월 23일 진린이 태어난 옹원현을 방문한 이후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종친들의 요청에 따라 2001년 족보가 만들어졌다. 진방식 회장은 중국을 수차례 방문해 자료를 수집, 족보편찬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사료 진린 왜곡, 사실 바로 잡아야

강직 청렴, 이순신 장군과 공통점

한국에 정착한 이들은 친일파인 춘원 이광수가 1931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순신>에서 진린 장군이 상당히 왜곡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왜곡된 진린 장군에 대한 평가 때문에 가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중국 출신 가문인 여양 진씨로 집안을 합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다.

이광수는 이순신 혼자서도 적을 소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진린이 1만 명에 가까운 수군을 데리고 내려와 순신의 행동을 방해해 적을 놓아 보내 마침내는 순신을 죽게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고 했고, 김훈의 <칼의 노래>와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은 진린 장군이 이순신의 공을 가로채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회유에 휘둘려 왜적의 퇴로를 열어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진린 장군이 공적에 욕심을 부리고 정유재란 말기 퇴각하는 왜군을 쫓는데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린 장군을 연구하는 장경희 교수(한서대, 문화재청 전문위원)는 지금까지 진린의 평가는 가혹할 정도로 왜곡돼 있어 정확한 사료 연구와 조사를 토대로 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명나라군에 의해 세워진 관왕묘에 관심을 가지면서 진린 도독의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과 중국 문헌을 찾고 중국 광동성에 가서 현지 조사를 벌였으며, 곧 진린 장군 평전을 쓸 계획이다.

장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1598년 진린이 출병하기 전 요동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선조가 보낸 선물을 보고 ‘아직 전공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어찌 이런 선물을 받겠느냐’며 돌려보냈으며, 한양을 떠난 한 달 후 선조가 선물을 보냈는데, 돗자리와 종이만 받고 많은 예물을 돌려보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에게 보낸 계첩에는, “보내주신 돗자리와 종이 두 가지는 배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왜장 소서행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싸우지 않은 유정 육군제독을 찾아가 그의 장군기를 찢고 ‘육군과 해군은 각자 알아서 할 일’ 라며 적의 퇴로를 막은 점, 노량해전이 끝난 후 선조에게 ‘찢어진 하늘을 꾀매고 해를 목욕시킨 공이 있다’고 이순신을 높이 평가한 점 등 여러 역사적 정황들을 보면 공적에 욕심을 부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두산백과 등에는 진린이 소서행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길을 열어줬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진린 도독의 함선은 500척, 수군 5,000명, 보병 등 1만 3,900명의 대규모였고, 이순신 장군은 범선 약간과 전선 3척, 그리고 수군은 500여명에 불과했다. 진린 도독은 노량대첩 후 남해도에 숨은 적 2,000여 명을 토벌한 후 대마도를 정벌할 것과 후임 통제사의 조속한 임명, 왜구의 재침입을 염려하며 조선 수군의 보강을 건의했다. 아울러 부산성과 한양의 성을 보강할 것을 건의했다.

진린이 “부산성은 성곽이 불완전해 적을 막을 수 없으나 만약 20~30만량의 은자로 무기를 보강하고 용사를 모집한다면 적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은 대마도와 가까워 순풍을 만나면 하루에 오갈 수 있어 적이 오는 길목이니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자, 선조는 “대인께서 이 나라를 깊이 생각하시니 감격스럽습니다” 했다. 진린은 또 “성을 쌓을 때 중국처럼 돌로 몇 층의 지대를 단단하게 쌓고 그 위에 벽돌을 매끈하게 쌓아 올려 침입해 오더라도 붙잡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경(한양)은 도성이 지나치게 크고 견고하지 않으니 개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며 하루 빨리 개축할 것을 건의하는 등 조선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정유재란 말기 퇴각하는 적을 쫓는데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에 대해 살펴보자. 노량대첩이 끝난 이후 왜군은 허겁지겁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진린 도독이 선조에게 보낸 계첩에서, “적추 소서행장이 우리 전함이 노량앞바다에서 도진의흥군과 격전을 할 때 틈타 도망쳐 추격하였으나 이미 대양으로 떠나 매우 한스럽습니다”라고 했고, “군사를 풀어 한명의 적도 남김없이 잡아 전공을 크게 빛내야 하겠습니다”라는 각오를 다졌다.

여하튼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보다 정확한 연구와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져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어 황조마을 진린의 후손들은 이제사 기지개를 펴고 있다.

▲ 진린 도독의 초상 400여년전에 그려진 초상으로 황조별묘 수리가 끝나면 이 사진으로 교체될 예정이다.

▲ 수리 전 황조별묘의 모습. 1871년(고종8년)에 건립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낸다.

▲ 수리 전 황조별묘의 모습. 1871년(고종8년)에 건립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낸다.

▲ 진방식 광동진씨 종친회장이 진린 도독의 묘가 있는 중국 운안구 육도진 남향촌 진린 도독 전승기념비 제막식에 참여했다. 사진은 중국 진씨 종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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