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오라기 로(鷺)·집터 대(垈) 노대도(鷺垈島)라 칭했다

 

▲ 노대도는 해오라기 로(鷺)와 집터 대(垈)자를 따서 로대(鷺垈), 노대(鷺垈)라 불리게 됐다. 바다 건너 보이는 상노대는 상리를 포함 3개의 마을 산등과 탄항마을이 있다.

중석기 세석기 출토 7,000여 년 전 정착민 거주
노대 일주도로 개설·하노대와 연도교 건립 주민 숙원

김석진(68) 상노대 상리 마을 이장을 지난달 28일 일요일 섬에서 만났다. 노대도 지명은 해오라기 로(鷺)와 집터 대(垈)자를 따서 로대(鷺垈), 노대(鷺垈)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져온다. 그는 노대교회 장로를 맡아 평일과 주말 쉴 틈이 없다. 상노대는 상리를 포함 3개의 마을 산등과 탄항마을이 있다. 북쪽에 상노대 남쪽으로 하노대 하리마을이 있다. 노대도 패총 유적지는 상리마을에 위치해 있다. 경남도 기념물 제27호로 중석기시대 ‘세석기’(細石器)가 출토됐다.

바다랑호가 도착한 산등마을 인근 섬은 용의 잠수를 보는 듯 연화도 용머리와도 닮았다. 낚시꾼들이 갯바위에 포진해 있었다. 두미도, 노대도를 바다랑호가 운항하고 있다. 하루 2편, 오전 6시 40분 오후 2시 통영항에서 출항한다. 삼천포까지 운항하며 4일장과 9일장이 서는 날은 삼천포항 출항편은 없다. 두미도 천황봉은 467m로 남해 부속섬 가운데 최고봉이다. 상리에서 상등마을행은 풀이 우거졌기에 김석진 이장은 걷기를 추천하지 않았다. 마을 동산으로 올라가 보니 지난 2012년 폐교된 노대초등학교 건물이 휑하다.

풀만 무성하게 자랐고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김 이장은 일주도로 개설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지만 땅 부지 확보가 여의치 않아 어려움을 토로했다. 운항선사에서 새로이 건조하는 차도선 운항이 되는 희소식도 전했다.

연대도처럼 상노대와 하노대를 잇는 연도교 건립도 바라고 있다. 김 이장은 상노대에서 태어났다. 하노대와 상노대 간 노 젓는 배를 타고 등교한 기억을 전했다. 김 이장은 노대초등학교 14회 졸업생이다. 학생수가 280여명으로 섬이 활기를 띌 때도 있었다. 이 학교 출신 염영관씨의 아들은 판사이다. 상리마을은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고, 45가구, 술과 담배가 없는 마을이다. 전 고동주 통영시장은 직접 술과 담배 없는 마을을 기념해 마을주민들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욕지 좌부랑개처럼 파시가 열려 선원들도 지갑이 두툼했다. 건립 100년 넘은 노대 교회는 장석기 목사가 맡고 있다.

김 이장은 “200톤 급 차도선이 오는 11월 운항예정이라 기대감이 적지 않다. 일주도로 개설을 바라고 있고 상노대와 하노대 연도교 개설을 통해 노대도 간 이동이 편해졌으면 한다”고 했다. 그의 아들은 김광수(45)씨는 통영시청 공무원이다. 상리마을 주민인 부부 추기원 씨와 강재읍 씨가 바다 조업을 나가기 전 하노대 하리마을로 배를 태워 이동시켜줬다. 슬하에 딸이 4명 막내아들 다섯이며 손녀와 손자 11명으로 총 23명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두 부부만 섬을 지키고 있다. 강 씨는 삼천포가 고향이다.

노대도는 1914년 원삼면과 사량면을 합해 원량면에 속했었다. 상노내도(1.532㎢)와 하노대도(0.57㎢), 납도를 포함한다. 경상도속찬지리지 고성현 편에 노태도(老太島). 상노대 초등학교 터에 숲이 짙었다. 나무위에 백로떼가 둥지를 틀고 서식했고 이런 연후로 해오라기 로(鷺)와 집터 대(垈)자를 따서 로대(鷺垈), 노대(鷺垈)라 불리게 됐다고 전해져온다.

인근 욕지항과 함께 남해안 어업발전의 주역이었다. 노대도 항만 가득 가두리 양어장을 설치해 도미, 우럭 등 고급 어종을 길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수입정책과 과잉생산으로 어가가 하락하고 사료비 인건비가 비싸 삼중고를 겪고 있다.

1885년 2년간 흉년으로 기근이 심해 고성권 신월리에 살다 추도에 잠시 이주해 있던 이태지가 노대상리마을에 당도해 정착 가능성을 살폈다. 멧돼지와 사슴 등이 서식했고 인적은 없었다. 공중겸, 한명찬, 강중여 부부 등 7세대 25명이 정주했다. 1950년대에는 40세대 이주자와 1976년 80여 세대 380여 명의 인구로 번성했다. 1910년대 개간 작업으로 보리 밀 옥수수 콩 등을 재배했다. 이후 쌀보리 고구마가 보급됐고 1960년대부터 마늘을 심게 됐다.

일제시대 어망어업의 발달로 챗배 들망 등 조업을 했다. 1980년대 장어통발, 낙지주낙 등이 성행했다. 어촌계마을 공동어장에는 톳, 전복 등을 나잠어업과 연계해 관리하고 있다.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차츰 전환되고 있다. 가두리 양식은 마을의 기간산업이다. 지난 1945년 5월 15일 노대초등학교가 개교했다. 1978년 2월 동력발전으로 전기를 사용하게 됐다가 1986년 7월 해저 케이블을 통해 전기가 들어왔다. 1970년 탄항 마을에 부산 무선국 노대분국을 설치해 첫 전화통화를 하게 됐다. 한 번 전화를 하기위해 1.5㎢ 제를 넘어 통신 가능 시간을 기다렸다. 1984년 한국 전기 통신공사 노대분국을 개설해 수화기는 30대로 늘려 가정 전화의 시초가 됐다.

식수는 1975년 10월 15일 준공된 상리마을 보물 제1호 우물이다. 가뭄에도 2m 수위는 항상 유지하고 있다. 2006년 욕지도 청사에서 노대간 해저관료를 설치해 노대 4개 상리 하리 산등 탄항 마을에 물이 공급됐다.

 

▲ 김석진(68) 상노대 상리마을 이장
▲ 상노대 산등마을
▲ 중석기 시대 세석기가 출토된 7,000여 년전 정착민 거주지

 

 

키워드

#N
저작권자 © 한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