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천동 테마파크 건너편의 기타이야기. 윤이상 거리에서 음악적인 요소를 갖춘 장소는 기타이야기가 유일무이하다

음악애호가들의 ‘문화교차로’ 꿈꾸는 『기타이야기』
기타이야기는 내 인생의 보너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들
“음악! 그것은 예술이기보다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

도천동 간선도로는 이름하야 ‘윤이상 거리’로, 세계적인 현대음악 작곡가인 윤이상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매년 성대하게 국제음악제를 개최하는 통영의 상징적인 거리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 어떤 ‘음악적 요소’를 찾자면 『기타이야기』말고는 없다. 대구 출신으로 평생 음악만으로 살아온 강주형씨(43)를 만나 그가 운영하는 기타이야기와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봤다.

 

컴퓨터공학도 꿈꾸던 싸움대장
인생의 반려자 기타를 만나다

그가 기타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다. “제가 그땐 싸움대장이었다”는 강주형씨는 “깡다구가 있어서 덩치 큰 5~6학년한테도 이기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런 아들이 걱정됐던 부친이, 음악을 접하면 좀 수그러질까 기대심에 기타를 선물했던 것. 컴퓨터공학도를 꿈꾸던 골목대장이 음악과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성공이었다. 강씨는 “기타를 만나고서는 밖으로 안 나가고 기타연습만 했다”며 “내재된 끼, 음악적 재능에 불이 댕겨진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제법 체계적으로 기타를 배웠다. “당시 친척 중 작곡사무실을 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에게서 연주법과 작곡법을 배웠다”고 한다. 넉넉하지 못했던 살림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에 새벽신문배달 해 번 돈으로 학원비를 대가며 기타에 몰두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들이 편했던지 아니면 음악에 대한 열정이었던지 밤무대 세션맨들을 찾아가 헬퍼(프로연주자들이 무대공연 하기 전 악기세팅, 청소, 튜닝 등을 미리 해주는 견습연주자)를 하기도 했다. “헬퍼였지만 그래도 배울 게 없을 것 같은 세션맨들에게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고.

강주형씨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악대부에서 관악기도 연주했다. “팔길이가 짧거나, 이빨이 가지런하지 않으면 트롬본과 트럼펫은 연주할 수 없다”는 강씨는 “그 악기 말고는 전부 다 다뤄봤다”며 웃는다. 학교밴드부를 결성해 기타와 보컬을 맡았고, 올스타팀이라 할 수 있는 대구고등학생 연합밴드에서도 보컬을 담당했다. 헬퍼경험도 있고, 대구 시내 대형호프집에서 통기타 연주자로 일하며 8만원의 월급까지 받는 ‘프로’였던 강주형씨는 당시 고교생으로서는 수준급이었던 셈이다.

 
기타이야기 강주형 사장

기타치던 손에 용접봉 들고서
첫눈에 반한 통영에 정착하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는 밴드음악의 전성기였다. 숱한 실력파 밴드들이 명멸을 거듭했다. 방위병 근무 때는 물론 전역 후에도 연주와 연습을 빼먹지 않고, 틈틈이 작곡까지 했던 그는 서울에서 오디션도 몇 차례 보고 자작곡 테이프를 들고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서울은 넓고 실력자도 많았다.

2005년 고등학교 밴드부 후배가 있는 통영에 처음 놀러왔다가 그만 이곳에 반하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한적한 바닷가에 살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통영이 바로 그랬다”고. 대구로 돌아가자마자 짐을 싸서 통영으로 이주했다. 26살에 만나 6달 만에 결혼했던 부인 조미현씨(41)는 황당했지만, 7살, 9살이던 아들들은 신났을지도. “그래도 일자리가 없었던 대구에 비해 통영은 경기가 좋았다”고. 기타만 치던 손에 용접기와 용접봉을 들었다. 처음 배웠지만 신나게 일하는 틈틈이 기타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강주형씨는 탱크용접하다 말고 푹 쓰러졌다. 눈떠보니 병원이었는데 간경화로 인한 혈관파열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렇게 간의 절반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간암까지 발견됐다. 간이식 말고는 방법이 없었지만, 적합한 기증자가 없었다. 강주형씨는 “그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유서까지 써놨었다”고 한다. 뜻밖에 부인 조미현씨가 적합판정이 나왔다. 강씨는 “혈액형이 다르면 안 될 줄 알았는데, 혈액치환 방법이 있어서 이식에 성공했다”며 “이게 기적이고, 이게 부부의 인연인가하고 생각했다”고.

 

통기타동호회, 보람찬 정기공연
제2의 인생, 음악으로 재능기부

강주형씨에게 현재는 덤으로 얻은 시간이다. 도움도 많이 받았다. 병원비는 있던 살림으로 턱없이 부족했지만, 통영의 지인들뿐 아니라 멀리 대구의 음악선후배들까지 십시일반 보태서 수 천 만원을 마련해 해결했다. 도천동 『기타이야기』도 지인의 도움으로 오픈할 수 있었다. “이젠 사회에 갚아나가야 할 차례”라는 그는 그래서 “재능기부 할 테니 행사가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통영시에 당부까지 해 놨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엔 밴드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지만 지금은 통기타 전수에 전념하고 있다. 통영통기타라는 온오프라인 모임을 첫 대외공연으로 이끈 것도 그였다. “2012년 첫 공연 수익금 300만 원으로 통영중학교에 기타 20대를 기증했다”는 그는 “기타이야기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문화교차로가 됐으면” 한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인생의 순간”이라는 강주형씨는 “음악은 예술이라고 구분하기 보다는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1980년대를 이끈 세계적 헤비메탈밴드 디오(Dio)를 우상처럼 여기는 강씨는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다함께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며 “지금 계획 중인 통영포크페스티발이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한다. 소박한 음악을 꿈꾸는 강주형씨의 『기타이야기』에는 또 어떤 에피소드가 적혀질지 지켜보자.

경력 35년의 마스터커리어가 물씬 풍기는 강주형씨의 통기타 시범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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