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승천길, 설영 장군 샘물, 통일신라시대 금불상

천황봉 산행길에서 바라본 청석마을 용머리 해안

천황봉 467m 산행은 다도해를 휘감는 무릉도원 등산

1937년 통일신라 금동여래입상, 청석마을 용머리 해안 백미
1996년 두미 입도 100주년 기념비 남구·북구마을에 건립

용의 승천길 전설과 설영 장군이 마신 샘물 스토리,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은 두미도 이야기이다. 청석마을 용머리 해안은 산행길의 백미이다. 두미도행은 다도해를 휘감는 자연의 경이로움과 마주한다.

매일 바다랑호는 오전 6시 40분 두미도 북구와 남구마을에 오전 8시 닿는다. 배삯은 남구마을 기준 9,550원. 오후 2시 출발 배편은 오전 1항차와 역코스 운항으로 연화도 등 다른 곳을 들렀다가 두미도 남구, 북구항에 마지막으로 도착한다.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며 배삯은 남구마을 기준 13,200원이다.

지난 8일 5대째 거주하는 신태근(62) 남구마을 이장을 만났다. 30여 가구 8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부인 정숙희(60)씨도 두미도에서 태어났다. 신 이장은 4형제 중 장남, 부인 정씨는 10남매 대가족으로 부부가 두미도에서 태어나고 결혼했다.

신 씨는 “사량도 방향에서 오는 동풍은 섬 주민들을 가둬놓고 꼼짝 못하게 할 정도로 위력적이라 이를 막을 방파제가 건립이 우선이다”고 했다. 그는 천황봉 아래 용굴이 있어 용이 승천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고 일제시대 쇠말뚝을 받았기에 이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지난 1937년 감로봉 감로사 절터에서 금부처가 발견돼 땅 주인과 발견한 이가 다퉜다. 욕지면지 기록에 따르면 파출소에서 쌀 2가마로 구입해 중재했다. 이후 금부처는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30cm 금동여래입상이다.

지난 1996년 두미 입도 100주년 기념비가 마을 선착장 초입 정자 뒤에 서있다. 최고령 어르신은 한두례(88), 김채억(88)씨이다.

마을청년 정진호(39)씨는 “임도가 연결됐지만 일방통행 또는 차량이 마주쳤을 때 우회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며 “내리막길 포장도 필요하다. 비가 오면 위험해 차량 진행이 어려운 구간도 있다. 소각장과 방파제 건립도 시급하다”고 했다. 정씨는 두미도 남구에 거주하는 젊은이로서 삼천포에서 중고교를 졸업했다.

남구~천황봉~북구 등산로 정비도 필요하다. 북구마을로 하산하다 길을 잃었다는 등산객들의 이야기가 빈번하다. 현재는 남구마을~천황봉만 자연스레 연결돼 있다.

두미도에 남해출신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지 60주년을 맞이해 세운 기념비가 있고 두미100년비도 지난 1996년 11월 28일 남구 선착장 입구에 주민이 세웠다. 두미개척백년비는 같은해 1996년 12월 8일 북구마을회관에 세웠다.

지난 2007년 경남도 지원사업 해양생태공원이 선정 해양마린센터를 설치해 개발중이다. 스킨 스쿠버 메카로 해양테마관광을 육성하고 있다.

에이치엘(HL) 해운 선사 바다랑호 대체 선박으로 오는 12월 차량 9대를 선적할 수 있는 190톤 규모의 차도선이다.

두미는 불가의 ‘극락세계 연화대의 두미를 욕지코자 하거든 문어세존하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근거가 알려진 바는 없다. 욕지도, 연화도, 우도처럼 종교적 의미를 연상케 한다.

북구마을 주민들은 쓰레기 유입 등을 이유로 산행을 반대하고 있어 등산객들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남구마을에서 청석전망대를 거쳐 천황봉 등산로는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발걸음조차 떼기 어려웠다. 나무 계단 데크는 무성하게 자란 풀들로 시야 확보도 쉽지 않았다. 긴 나뭇가지로 풀집을 헤치고 나아갔다.

지난 19일 두미도 신태근 이장과 욕지면사무소(이창구 면장)가 협조해 등산로를 정비했다.

청석 전망대는 풍광은 6성급 호텔보다 뛰어난 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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