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과 함께 난파하던 하청업체 경영자

조선업이 무너지면서,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도산을 맞았다. 개인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의 몰락 앞에서 조선업에 기대 회사를 운영해 오던 경영자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부터 선박 기자재 절단업을 해오던 청암산업도 마찬가지였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내리막길을 떠밀려 내달리면서, 정연면 대표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60여 명이나 되던 직원들은 이제 20여 명만 남았다. 오랫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해온 이들이다.

2016년 말부터 시작된 조선업 불황은 지금까지도 위태로운 고개를 넘나들고 있다.

이 내리막의 끝은 어디일까?

하지만 정대표는 쇠락해 가는 조선업의 옷자락만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수많은 부침(浮沈) 속에 걸어온 인생길이었다. 절망하고 있기에는 딸린 식구가 너무 많았다. 사랑하는 가족뿐 아니라, 20여 명 남은 직원들과 그 가족까지 함께 난파하고 있는 배의 선장이었기 때문이다.

선저폐수를 원천봉쇄하는 선미관실링으로 재기를 꿈꾸다

몇 년 전 정대표는 선박의 선저폐수를 차단할 수 있는 선미관실링을 개발해 특허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당장 해야 하는 기자재 절단만으로도 눈코뜰 새가 없었다. 바다 오염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제품이어서 소형선박에 꼭 필요한 것이었는데도, 이 특허품은 5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해양 오염에 대한 문제에 대한 인식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정대표는 잠자고 있던 실링을 들고 재기에 나섰다. 그동안 품질 검증 올해 5월의 일이다.

“선미관실링은 선박의 오폐수 발생 원인을 차단하는 선행관리 시스템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실링은 배의 기관실에 해수가 차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지요.”

현재 국내 소형 어선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그랜드패킹 또는 특수구조 선미관(stem tube)은 어쩔 수 없이 기관실로 해수가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청암에서 만드는 실링은 선박의 기관실 최말단부에서 바깥의 프로펠러까지 선체를 관통하여 설치되고 회전하기 때문에 해수유입을 완전 차단한다.

정대표는 배의 크기에 맞도록 갖가지 사이즈의 실링을 만들어, 선주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관습을 뚫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지금까지 어민들은 기관실에 바닷물이 차는 걸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해 왔다. 배가 운항을 하다보면 늘 기관실에 많든적든 해수가 들어와 찼었고, 기관실 해수는 당연히 엔진오일과 섞여 선저폐수(bilge)가 됐다. 기름띠가 보이기는 하지만 바다에 버리면 그만이었다. 윤활유 교환 시에 발생하는 폐유는 당연히 관계기관에 반납·처리하면서도 빌지는 더러운 물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빌지를 바다에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다 바다에서 먹고사는데, 바다가 오염되면 어업도 망합니다.”

빌지를 아예 만들지 않는 실링 제품을 소개하면서, 정대표는 해양오염에 대해 경고한다.

실제로 1년 동안 국내 해양에서 배출되는 빌지량은 태안반도 기름 유출량의 10배라고 한다. 고의로 빌지를 배출하다 적발되면 5년 징역과 5천만 원 벌금을 내야하고, 실수로 배출했다 하더라도 3년 징역에 3천만 원을 벌금으로 내야한다.

청암에서 만든 실링은 해양오염을 막아줄 뿐 아니라 축 회전시 마찰 저항이 없어 효율이 높고 시간 단축 및 연료 절감효과를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선박의 경우 3년마다 축을 교정 수리합니다. 그러나 이 선미관 실링장치는 10년 이상 거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자체와 함께 해야 할 일

청암의 선미관실링은 장기적으로 보면 비용뿐 아니라 배 관리에 드는 노동력도 절감해 준다. 그런데도 해양오염방지 설비 설치의무가 없는 100톤 미만의 영세 소형어선 선주들은 150만 원 이상 되는 초기의 목돈을 부담스러워했다. 되도록 가격을 맞춰 주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건 재료가 ‘비첼’이라는 특수금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대표는 지자체 지원사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시청 관계자들을 만나 이 실링이 모든 선박에 다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여태 아무 의식없이 빌지를 방출해 온 어민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군설비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설파했다. 통영처럼 ‘청정해역’을 유지해야 도시 전체가 살아나는 지자체에서는 이것이 한 특허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시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어민들에게 지자체의 지원이 돌아가, 설비가 좀더 쉬워질 것입니다.”

조선업의 불황 속에서 오히려 모두가 상생하는 새 길을 찾은 것이다. 실링 사업에 몰두하면서 정 대표는 갑자기 환경운동가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때가 많다. 바닷가에 쌓이는 스티로폼 부표를 보면서도 ‘제도적으로 청소 시스템을 갖출 순 없을까?’ 고민하게 되니 말이다.

“배의 수명을 늘리고 바다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니 보람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정대표는 ‘내가 열심히 뛰는 것이 통영과 나라를 위한 일이라 여기고’ 새 길을 힘차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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