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지 묵을 거 묵고, 내는 내 묵을 거 묵고”

통영시 광도면 전두리에서 약초 모종을 재배하는 김수찬 씨는 농약도, 비료도 없던 시절에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했듯이 손으로 풀을 뽑고 벌레를 잡는다.

밭에 농약을 치지 않아 절대로 ‘박멸’할 수 없는 벌레들이 쌈채들을 뜯어먹어도 “지는 지 묵을 거 묵고, 내는 내 묵을 거 묵고.” 하고 말할 뿐이다.

여름엔 풀과의 전쟁이다.

그러다보니 수찬 씨네 밭은 풀 반 약초 반이다.
“저 게으른 놈, 온 만신에 저래 풀밭을 맹그러놓나?”

동네 어른들이 수찬 씨 밭을 지나가며 혀를 차도 수찬 씨는 밭에 제초제를 뿌릴 마음이 없다. 풀은 작물을 해치지 않을 정도면 되고 뱀 나올까 무섭지 않을 정도만 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름에는 돌아서면 풀이라, 풀과의 전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수찬 씨는 풀과의 전쟁에서도 지고 만다.

“지야지, 우얄 낍니까? 저는 그냥 풀한테 자리를 내주고 맙니다.”
비가 한번 오고 나면 풀이 무성해져 어느 게 작물이고 어느 게 잡초인지 구분할 수도 없게 돼 버린다.

풀도랑 농장.

풀과의 전쟁에서 백전백패하는 농사꾼

수찬 씨네 약초농장 앞에는 ‘풀도랑’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다. 집앞에 도랑이 하나 있고 그 도랑에 많은 풀들이 살아서 ‘풀도랑’이기도 하고, 집 안팎으로 온통 풀이 도랑을 이루고 있어서 ‘풀도랑’이기도 하다. 그 풀 사이에 보배같은 약초들이 자라고 있다.

“지는 기, 그게 이기는기라요. 풀하고 약초하고 즈이끼리 싸와보고 이기는 기, 그기 강한놈이라. 우리는 이긴 놈들만 재배합니다.”

아이들은 놀이하듯 아빠를 돕는다.

잡초를 이긴 약초는 키도 작고 모양새가 볼품없다. 하지만 향과 효과는 더 진하기 마련이다. 생각해 보면 훨씬 못난이라도 자연산 약초가 재배약초보다 비싼 값에 팔리는 이유도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자라 진한 약효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이 키우도록 두는 게 더 좋은 약초 재배 방법일밖에.

수찬 씨의 농사법은 ‘태평농법’이다. 한 마디로 뿌려놓고 “니 알아서 크거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사꾼이 손을 놓고 노는 것은 아니다. ‘어떤 풀이 번성해야 내 약초를 지킬 것인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풀은 번질 대로 번지면 저절로 죽십니다. 그 잡초가 번성하다 죽어버리면 내가 원하는 약초가 힘을 얻고 번성하지요.”

그래서 수찬 씨 부부는 자연을 공부한다. 그리고 무리하게 흙과 작물을 재촉하지 않는다. 묵은 밭을 몇 번 털어내고 쉬게 하기도 한다.

작년에 단삼모종 수백 개를 사간 노부부가 울상이 되어 다시 모종을 구하러 왔다. 물도 주고 풀도 매주고 온갖 사랑으로 키웠는데 단삼이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수찬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우째 죽입니까? 이래 잘 사는데.”

사춘기 자녀들은 제법 자기몫을 한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

풀도랑에서는 던지듯이 심어놓은 단삼이 어느새 밭모퉁이를 다 차지하고 있다.
“너무 잘 살펴도 죽심다. 그냥 죽을낀가 싶어 물로 더 주고 하다 보믄 되레 죽는 기라요. 무심하게 놔두면 지들이 싸와가며 버티 가며 자랍니다.”
과잉보호가 자식을 망치는 것처럼 약초도 과보호를 받으면 자생력을 기르지 못해 죽기도 한다. 땅을 놀리는 것도, 너무 많은 거름을 하지 않는 것도 다 이런 이유다.
약초의 입장에서는 이만큼 자유로운 밭주인도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아내 정미 씨는 블로그에다 “산에 사는 약초들은 여러 종류가 서로 어울려 자라고 있다. 그런데 왜 밭에 사는 약초는 저희들끼리 모여서만 살아야 할까?”라며 ‘더 자연과 똑같이’ 키우지 못하는 부담을 써놓기도 했다. 부부가 얼마나 자연 닮은 농사를 짓고 싶어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농약을 치지 않은 채소들.

자연이 키우는 약초농장 ‘풀도랑’

반평생이 지나도록 한 번도 통영을 떠나본 적 없는 김수찬 씨네 부부가 태평농법으로 약초를 재배하기 시작한 건 시골집에 갇힌 아내의 마음병이 깊어졌을 때다.

집안 어르신들이 처음 만나 소개하는 자리에서 결혼 날짜를 잡고, 서로 말도 놓기 전에 시골집에 들어와 살게 된 정미 씨는 내리 3형제를 낳고 우울증이 생겼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특이한 꽃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약초 농사로 옮겨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자라는 약초 농사를 시작하면서 수찬 씨 부부는 태평농법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내 정미 씨는 ‘풀도랑, 약초가 잡초되는 세상’이라는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어 농가의 일상을 전하며 소비자와 소통한다.

풀도랑에서는 단삼, 영양부추, 일당귀, 한련초, 토종꽈리, 왕까마중 같은 토종 작물뿐 아니라, 모라도야콘, 아피오스 같은 외래종 약초들도 저마다 효능을 자랑하며 자라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풀만 가득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미나리가 영역을 넓히고 있고 민들레도 살고 있고 천문동과 방아도 있다.

세월이 지나자, 알음알음 꼭 풀도랑에서만 약초모종을 사겠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미리 예약해 놓고 1주일에 한 번씩 자라는 걸 확인하고 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

“작년에는 일부러 도꼬마리를 수확하기 위해 밭을 1년 놀렸다. 잡초와 함께 고생하며 자라 비쩍 마른 도꼬마리는 그만큼 더 강인하게 자랐을 터다. 약초의 생명력은 강인함에 있는 것이므로.”

정미 씨가 올려놓은 글에서도 진한 약초 향기가 난다.

대촌마을 청년회원인 수찬 씨는 요즘 서각을 배운다.
수찬 씨가 출품한 대촌마을 서각전시회에서 막내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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