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클래식 음악에는 슬픔을 나누는 음악이 참 많습니다. 이별, 서러움 등을 표현하는 음악 역시 슬픔을 나누는 음악이겠지만 슬픔을 나누는 음악 중 비장하고 자주 연주되는 음악은 아무래도 죽음에 대한 음악입니다. 장송행진곡, 레퀴엠 같은 장르를 들 수 있겠군요.

장송행진곡은 죽음을 추도하는 음악으로 funeral march라고 표시합니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단독으로 장송행진곡이라는 음악도 있지만 교향곡 같은 다악장 음악에서 한 악장을 장송행진곡이란 이름으로 작곡되어진 것도 많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E♭장조 op.26의 제3악장 ‘어느 영웅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송 행진곡’,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E♭장조 op.55 ‘영웅’의 제2악장,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제2번 b♭단조 op.35의 제3악장.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 중에서 연주되는 ‘지그프리트의 장송 행진곡’등이 있습니다. 말러 교향곡 5번 1악장의 장송행진곡도 빼놓을 수 없죠.

죽음을 추도하는 음악을 좀 더 넓혀 보면 각종 레퀴엠도 포함됩니다. 레퀴엠은 미사곡이라는 전제가 있기에 장송행진곡처럼 곡의 일부에서 사용되는 것보다 하나의 큰 곡 전체를 가리킵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베르디의 ‘레퀴엠’,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등이 대표적인 곡입니다.

장송행진곡은 여러 유명인사들의 장례식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다른 외국의 대통령의 사례도 있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김구 선생님의 국민장에서 운구행진곡으로 쇼팽의 장송행진곡이 연주된 적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여러 곡들의 경우 대개는 특정인을 위한 음악은 아닙니다. 작곡가 스스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대상을 상정하고 작곡했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인 죽음에 대한 애도 음악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르크너의 교향곡 7번은 특이합니다. 부르크너는 7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중 리하르트 바그너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가장 존경했던 작곡가인 바그너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7번 2악장에 담았다고 합니다. 부르크너 교향곡 7번 하스 판의 첫 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2악장은 바그너의 죽음을 기리는 곡이라고 하는군요.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을 나타내는 곡이라고 해서 꼭 장송행진곡이나 레퀴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 윌리엄스의 '날아오르는 종달새' 같은 곡은 종달새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서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을 그리고 있는데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다다르는 느낌을 주기에 장례식에서 연주될 정도로 애도와 슬픔을 주는 곡이기도 합니다.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역시 그러한 곡입니다. 플래툰의 마지막 장면의 삽입곡으로 사용되기도 한 이 음악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장례식장에서도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매우 비통한 감정을 드러내는 음악입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또한 이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윤이상 선생님의 ‘작은 새’도 생각에 따라서는 이 범주에 포한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또 한명의 유능한 정치인을 잃었습니다. 그 분의 생각에 동의하시는 분은 당연히, 그렇지 않은 분이라고 할지라도 제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그 분이 돌아가시게 된 이유가 아니었다면(이것 역시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청렴한 정치인의 표상이었습니다. 그 분이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오카리나 음색으로 연주한 곡이 있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바로 그 연주한 곡의 이름입니다.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의 장송행진곡이 생긴 것 같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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