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역사여행의 길잡이....

우리에게 잊혀진 ‘해양 DNA’를 찾다.

이순신 수국(水國) 프로젝트 후속편....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 (저자 장한식)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 포구에 위치한 통영은 지방 도시 이상의 무게를 지녔다. 통영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삼도수군통제영 덕분이다. 수군통제영과 그곳을 다스렸던 통제사들은 조선인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울의 연구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 통영에 위치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수행한 시대적 역할과 파급력은 크고도 깊었다. 그랬기에 지금은 한적한 관광도시, 수산도시에 불과한 통영이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풍성한 사연들이 넘쳐나도록 담겨 있다.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산수야)은 지금껏 소홀히 다뤄졌던 통제영의 역사적 중량을 복원하고 주변부에 머물렀던 통영과 해양의 중요성을 재조명한다.

남해바닷가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생긴 계기는 조일전쟁(임진왜란)이었다. 대전란을 경험한 이후 조선왕조는 생존본능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이란 계획도시를 건설하였고,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군영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물산이 풍부한 해변에 많은 군력이 집중되면서 통제영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큰 비중을 갖게 되었고, 역으로 한양의 중앙정치에까지 실질적 파워를 투사할 수 있었다. 300년 통제영 역사에는 208대에 이르는 삼도수군통제사들의 풍성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책은 ‘바다를 버린 나라’ 조선에서 해양문화의 창(窓)이자 요람으로 기능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와 문화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굴절됐던 한반도 해양문화의 회복을 시도하며 갯내음 물씬 풍기는 통영의 역사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저자 장한식은 통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신문학과(현 언론정보학과), 동(同)대학원을 졸업하고 1991년 KBS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와 정치부 등 여러 부서를 거쳤고 베이징특파원을 지냈다. 이어 뉴스제작부장과 경제부장, 사회부장, 해설위원, 편집주간, 전략기획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의 격전지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통영시 용남면의 해변마을에서 태어난 저자는 석사학위 논문 제목이 <구한말 근대적 통신제도의 구축에 관한 연구>였을 정도로 한국사의 여러 분야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을 집필한 가장 큰 이유는 이순신이 만든 한산도 통제영이 저자의 집 근처에 있기도 하거니와 ‘이순신이 싸운 바다’가 어떠했는지를 날마다 관찰하면서 자라서인지 기존의 역사 연구자들이 ‘문헌’에서 놓친 부분을 적지 않게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저자는 과거에서 미래의 비전을 찾을 수 있다는 견지에서 역사문제에 제법 천착해 왔던 바 1999년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를 저술하였다. 2015년에는 ‘나라의 크기로 상하(上下)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며 작은 나라도 꿋꿋한 의지와 실력이 있다면 능히 큰 나라에 맞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만주족 역사서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를 출간하여 식자층의 주목을 끌었다. 2018년에는 대한민국 해양사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을 저술하였다.

 

<목차>

프롤로그

용(龍)을 닮은 도시, 통영

 -통영 고지도(統營 古地圖)

 -두룡(頭龍)의 포구

 - 한국 해양사(海洋史)의 중심 삼도수군통제영

 

제1장 삼도수군통제사가 뭐길래?

 -통영 토성고개의 전설

 -인조반정의 승자(勝者) 구인후 통제사

 -인조반정의 패자(敗者) 원수신 통제사

 -1623년 봄, 통제영의 유혈(流血) 군권교체

 -무신들의 로망 삼도수군통제사

 

제2장 조일전쟁과 수군통제사

 -통제영 전사(前史)…‘바다를 버린 나라’ 조선

 -해양포기가 초래한 일본의 기습(?)전쟁

 -이순신과 한산대첩

 -원균과의 갈등, 이순신 통제사에 오르다

 

제3장 ‘전쟁의 선물’ 삼도수군통제영

 -한산도 통제영 시대(1593.8~1597.7)

 -모항(母港) 없는 유랑시대(1597.7~1597.10)

 -보화도 시대(1597.10~1598.2)

 -고금도 통제영 시대(1598.2~1598.11)

 -종전 후 최대 논쟁, 해방본영(海防本營)의 위치 선정

 -두룡포에 통제영을 건설하다

 

제4장 통제사, 해상총독으로 군림하다

 -해변의 수도(首都)가 된 삼도수군통제영

 -‘36,000장졸·548함대’ 병권(兵權)을 쥐다

 -‘해상총독’ 통제사의 권력

   통제사의 행정권

   통제사의 사법권

   통제사의 경제권

 -통제사에 대한 처우

 -통제사 통제대책

 

제5장 역대 삼도수군통제사

 -누가 통제사가 되었나?

 -무장가문(武將家門)의 통제사직 독과점

 -실력보다 핏줄?…통제사 혈연도(血緣圖)

 

제6장 활동량 많았던 초창기 통제사(1593~1662)

 -‘원조(元祖) 통제사’ 이순신과 원균

 -조일전쟁을 경험한 통제사들

 - 인조반정으로 운명 바뀐 통제사들

 -후금·청(淸)과 관련 깊은 통제사들

 

제7장 전성기 통제영, 의욕 넘친 통제사(1662~1751)

 -실력으로 입신(立身), 실수로 망신(亡身)한 통제사들

 -통제사 역임 후 경영대장(京營大將)에 오르다

 -통제사 역임 후 경영대장(京營大將)에 오르다

 -잦은 환국(換局)…통...(하략)

 

책속으로

  용을 닮은 땅 두룡포(頭龍浦)… ‘우두머리 용의 포구’에 바다를 지키는 용들이 넘쳐났으니 통영은 ‘용의 도시’가 분명하였다. 중앙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해변에서 왕처럼 군림하였던 ‘두룡포의 주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해왕(海王), 또는 용왕(龍王)에 비견될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였고 서울의 궁궐을 제외하고는 조선팔도 어떤 도시보다 웅장한 100여 동의 관아건물군을 자랑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용궁(龍宮)에 비유할 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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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은 ‘삼도수군통제사의 군영(軍營)’을 뜻하는 만큼 통제영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통제사(統制使)란 직책이 설치된 경위부터 살펴야 한다. 경상전라충청, 삼도(三道)의 수군을 통할하는 관직인 통제사가 첫 등장하기는 조일전쟁(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음력 8월의 일이다. 1592년부터 7년간 지속된 조일전쟁의 시말(始末)은 수없이 다뤄져 식상할 정도지만 통제영이 출현하게 된 시대배경이란 점에서, 수군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새롭게 조망해 볼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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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은 동시에 생겨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통제사가 머무르는 군영이 곧 통제영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통제사란 직책은 생겼지만 제도적 의미의 통제영은 한동안 건설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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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룡포 동쪽 견내량 수로의 중요성은 조일전쟁 때 입증됐다. 이순신이 견내량을 틀어쥐고 있는 동안 일본 해군은 거제도 서쪽을 넘보지 못했으니 이곳이야말로 해상의 문경새재였던 것이다. 두룡포 서쪽에 위치한 착량(鑿梁)은 통영 시내와 미륵도 사이를 가로지르는 통영운하의 옛말이다. 조일전쟁 이전까지 이곳은 밀물에는 바닷물이 통하고 썰물이 되면 육지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여울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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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철… 통제영 앞 바다에 삼남의 수군과 전선들이 총집결해서 일자진과 장사진, 학익진 등 각종 진형을 형성하며 가상의 일본 해군과 모의전투를 치르는 대형 전투훈련 장면은 참으로 볼만했다고 한다. 전선에서 발사한 대포소리는 내륙 깊숙이 울려 퍼지며 수군의 존재를 백성들에게 각인시켜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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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도 연해의 군권과 행정권, 사법권, 조세징수권 등 각종 권력이 통제사에게 집중돼 있었다. 통제사가 군권 외에 각종 권한을 확보한 것은 해방을 위해 삼남의 해변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도록 힘을 몰아준 조정의 의지가 반영된 때문이었다. 체제 생존의 방편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통제사는 삼도 해민(海民)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해왕(海王)이나 다름없었고 통제영은 ‘해상의 총독부’에 비유할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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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창건한 통제영이었지만 1895년 폐영 때까지 조일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통제영은 일본군의 재침 방지를 위한 역할은 100% 완수했지만, 전란이 없었기에 그 가치를 입증하지는 못한 셈이다. ‘제2의 충무공’을 꿈꾼 통제사들 역시 전공을 세울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통제영 300년이 결코 무의미한 시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 해양사(海洋史)에 큰 보람을 가져다준 기간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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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이후의 세계사는 바다를 활용하는 능력이 각국의 운명을 갈랐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처음에는 동양이 앞서 나갔다. 중국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시절이던 1406년부터 7차례에 걸쳐 정화가 이끄는 3만 명의 함대로 동남아와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대항해의 역사를 썼다. 유럽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보다 먼저 ‘지리상의 발견’에 나선 셈이다. 이때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중국은 기왕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을 더욱 강화하며 바다를 멀리했다. 그 결과 세계 최선진국, 최강국이던 중국의 국력은 점차 서구에 뒤처지게 된다. 조선조의 해양사도 중국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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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시의 뿌리인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적 무게와 현대적 가치를 공감하게 된 독자들에게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통영 출신으로 1998년 1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출발한 ‘발해 1300호’란 뗏목을 타고 발해-일본 간 동해횡단항로를 확인하는 항해를 하던 중 차가운 바다에서 산화한 고(故) 장철수(張哲洙) 대장이다. 1986년 첫 대학생 독도 동아리인 ‘독도문제연구회’를 만들 정도로 독도와 바다에 미쳤던 사람…

372-373페이지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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