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남면 동달마을에 장군펜션 운영하며 통영음악창작소 오픈예정, 음악작업 지속하고 통영인재 발굴 병행

 “갈매기 날으는 강구안에는 통통거리는 작은 배들♩♪~ 동피랑 지나서 산양 가는 길 척포까지 자전거 여행~”

흥겨운 연주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통영을 노래하는 작곡가 겸 가수 가인가일의 ‘통영 가는 길’ 가사 일부다. 2011년쯤 인생 처음으로 통영을 만나 경험하고 곧바로 통영에 흠뻑 반해버린 그가 끓어오르는 영감에 사로잡혀 만든 수많은 작품 중 하나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10년의 세월을 찰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사랑도 결국은 현실 아닌가? 조선업 위기 등 잇따른 불황의 여파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던 가인가일은 1년여의 객지생활을 강요받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고향을 떠났건만 몸이 멀어질수록 마음 깊이 그리워지는 사랑의 감정을 주체 못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 다시 통영으로 돌려 미늘고개 아래 동달에 또다른 안식처를 잡았다.

노래는 머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은 세상의 풍파를 껴안을수록 굳건해지고, 넓어지고, 평온해진다. 평생 풍파를 껴안아온 가인가일을 만나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었다.

 

Q. 오랜만이다. 통영을 1년 정도 떠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영을 떠났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분명한 것은 나는 통영을 떠난 적이 없다. 집도 여전히 통영에 있었고, 단지 여행이었다. 몸이 어디에 있던 마음은 항상 통영에 있었다. 사실 통영 경기가 나빴지 않은가? 라이브클럽 ‘창 너머 바다(창바)’는 작년 9월말까지 영업하고 폐업했는데, 폐업 전 약 2개월 정도 충남 천안의 라이브클럽에서 출연계약을 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급료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작년 말 잠시 통영 집에 내려왔다가 충북 청주에 박달재 정도령이라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인근에 살던 또 다른 친구에게서 자신의 라이브클럽을 직접 경영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장비 등을 싸들고 올라갔다. 근데 그 친구가 권유한 클럽은 건물주와 채무관계가 아직 남아있던 가게였고, 결국 내가 손해를 감수하고 영업을 했다. 청주와 통영을 일곱 번이나 왕복하며 작은 트럭으로 이삿짐을 옮긴 뒤라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른 사연도 있지만 가게는 꽤 잘 됐고, 영업이 안정적 상태로 들어가나 싶었는데 알다시피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결국 가게, 살림집, 사무실 보증금까지 받아내기 어려워진 상태가 돼버렸다.

 

Q.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통영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여의도순복음교회 재단인 베데사대학이 있다. 조용기 목사가 나를 무척 아껴주셨는데, 이 대학에 실용음악과를 창설하면서 학과장을 맡았다. 이때가 30대 중반이었다. 낮에는 학교업무를, 밤에는 음악활동을 했던 당시엔 재정적으로도 넉넉했는데, 피치 못하게 연대보증을 서면서 거액의 채무를 떠안게 됐다. 그때가 IMF가 온 직후였다.

이후 설악산에 들어가서 그야말로 수렵채집에 의존하는 산중생활을 9년 정도 했다. 나의 산중생활에 비하면 자연인은 호사스러울 지경이다. 2007년쯤 산에서 내려와 이리저리 여행하면서 음악활동을 하곤 했는데, 천안에서 1년 가까이, 경주에서 몇 개월, 부산에서 1년 정도 라이브클럽 운영 등을 했다.

그러다가 부산에서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로 바닷가를 따라 음악여행을 했는데, 그러다가 방문한 곳이 통영이다. 부산까지 왔다가 바로 옆에 있었던 통영으로 오기 위해 반대방향으로 한반도를 한 바퀴 돈 셈이다. 그때 통영에 도착한 뒤 정량동에 숙소를 잡고 산양일주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는데 통영의 경치와 바다, 저녁노을이 너무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야말로 첫눈에 반했다.

나중에 내가 직접 운영하게 될 줄도 모르고 그날 저녁 숙소에서 소개를 받아 ‘창 너머 바다’를 찾아가기도 했다. 외모에서부터 뮤지션으로 보였는지 그때 당시 사장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3개월 정도 같이 일했다. 그러다가 산양읍 중화동 바닷가 경양식집을 넘겨받아 반년 정도 영업을 했고, 1년쯤 뒤 창 너머 바다의 바뀐 사장으로부터 동업을 제안 받고 얼굴사장으로 일하다가 1년 뒤 가게를 인수했던 것이다. 그때가 2013년~14년쯤이다.

 

Q. ‘통영 가는 길’은 그때 쓴 곡인가? 이외에 통영을 소재로 한 노래들은 또 어떤 게 있나?

-통영에 관한 곡을 지금까지 30곡정도 만들었는데, 산양일주도로를 돌면서 통영과 사랑에 빠지며 받은 영감으로 작곡한 첫 곡은 맞다. 그 노래 말고도 ‘통영연가’, ‘산양에 가면’, ‘평림에서 풍화까지’, ‘강구안연가 등이 있다. 앞으로도 계속 통영에 대한 노래를 만들 것이다. 300곡 정도는 나올 것 같다. 7월 중순 음악창작소가 완성되면 본격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통영음악창작소는 통영에 대한 음악을 만드는 곳이자, 통영에서 음악작업을 하는 곳이다.

 

Q.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노래를 직업으로 하게 된 일을 소개해 달라.

-어릴 때는 탁구를 했는데 아주 잘 하는 편이어서 소년체전에도 출전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반대하셔서 운동을 계속 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아주 보수적인 분으로 음악을 하는 것을 싫어하실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교회가면 성가대가 있으니까 피아노, 기타 등 악기가 있지 않은가? 혹시 그런 것과 접촉할까봐 교회에도 못 가게 하실 정도였다.

그래도 내가 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중2때 경희대 다니던 친구 형한테 과외를 받으러 갔는데, 그 형이 기타를 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나도 기타를 사서 연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께 사달라고 할 수 없어서 새벽 신문배달을 했고, 배달하고 남는 신문을 주차장에서 팔아서 여분의 돈을 벌기도 했다. 그렇게 몰래 구입한 기타는 교회에 갖다 두고 교재를 사서 혼자 기타 치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할 수 있었다.

 

Q. 다시 통영에 돌아와 정착하려고 한다. 기분이 어떤가?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나는 통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미 살고 있는 이곳에 다시 정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통영은 내 음악을 묻을 곳이자, 내 뼈를 묻을 곳이다.

 

 

Q. 장군펜션도 같이 하는데, 잘 됐으면 좋겠다. 코로나19인데다 통영관광도 예전 같지 않아 걱정이 많을 것 같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곳에는 방이 모두 9개가 있다. 이 중 3개는 음악창작소 등을 위해 내가 사용해야 하고, 나머지 6개를 펜션으로 활용할 것이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 감사하겠다.

아까 음악창작소에서 해야 할 일이 두 가지라고 말했는데 사실 하나가 더 있다. 예향통영에는 음악에 재능 있는 아이들도 많을 텐데 그런 재능 있는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수로 육성하고 싶다는 말이다.

 

가인가일은 최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하루 죙일 소나무 가지치기하다 잠시 멍때려 봅니다. 펜션과 카페 그리고 음악창작소, 페친님들의 관심과 성원으로 이번 코로나 확진자 0명인 청정 통영에서 이 힘든 고단함이 엔딩될 거 같습니다.”

그는 ‘통영연가’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여 오늘밤 별빛과 술 한 잔 생각난다면 통영에 가자 ♩♪ 오늘밤 못 잊을 이름과 사랑이 그리워지면 통영에 가자 ” 만일 여러분이 통영에 오면 장군펜션과 그의 통영음악창작소를 둘러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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