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 대한인국민회관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재미한족연합회 대표들. 동그라미 표시인물이 김형순 선생이고, 바로 앞에 앉은 이가 동업자인 김호 선생이다.
미국 LA 대한인국민회관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재미한족연합회 대표들. 동그라미 표시인물이 김형순 선생이고, 바로 앞에 앉은 이가 동업자인 김호 선생이다.

뿌리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분이 계신다. 바로 김형순 선생. 철도 들기 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향을 떠났고, 머나먼 이국의 타향에 정착한 인연을 가졌지만 우리는 인지하지도 못했던 일을 오히려 리들리시에서 자기 도시의 자랑스런 역사로 여기며 뿌리를 찾다보니 통영까지 맺어졌으니, 100년을 넘나드는 인연의 소중함이야.

김형순 선생의 부친은 조선말 급진적 개화파의 일원이었던 모양이었다. 1884년 김옥균을 중심으로 일으킨 갑신정변이 삼일천하 실패로 끝나고, 연관자들은 잡혀서 피살되거나 외국으로의 망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의 부친은 피신지였던 통영에서 1886년 5월 4일 김형순 선생을 낳게 된다.

 

고향 통영 5살 떠나 인천 이모댁에

그러나 그는 철도 들기 전 5살 때 인천의 이모에게 보내졌다. 여기서 그는 미국인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 한국명 조원시)목사로부터 영어와 서양학문을 배웠으며 세례까지 받았다. 또 존스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아펜젤러 목사에게 보내져 전액 장학생으로 공부했으며 1901년 졸업했다.

졸업 후 대한제국 인천세관 직원으로 1년쯤 근무하다, 1902년 하와이 이민자들을 돕는 통역관 겸 인솔책임자로 최초의 이민선을 타고 마우이(Maui)섬 사탕수수농장에 도착했다. 이 농장에서 6년간 일한 뒤 1909년 귀국을 한 김형순 선생은 존스 목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성악과 출신 한덕세(1896~1977)를 만나 결혼했다. 개인적으로는 허니문이었지만, 일제의 위력 앞에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한 격랑의 시기에 그는 결국 고국을 등지고 미국행을 선택한다.

일단 1911년 중국 상하이로 간 그는 1913년 8월이 돼서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갈 수 있었다. 국적을 잃은 청년에게 대한제국 세관관료, 이민자 통역관 겸 인솔자라는 경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나성고등학교(LA High School)에 입학해 고학으로 마친 그는 노동일과 부인의 음악교습으로 얼마간의 자본을 축적하고는 1916년 봄 LA북쪽 중부캘리포니아주의 과일 농장지역 리들리(Reedley)에서 묘목상회를 설립하며 정착했다.

미국의 한 농대교수이자 과일육종전문가로부터 넥타린(Nectarine) 복숭아 특허품 묘목전매권을 확보해 미국 전역에 보급하는 기회를 잡았다. 사업이 확장일로에 들어갈 쯤 1920년 선생은 동업자 김호(金乎)를 만나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를 새로 설립하는데 이후로도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김형순 선생이 창업한 김브라더스(김형제상회) 직원들의 모습.
김형순 선생이 창업한 김브라더스(김형제상회) 직원들의 모습.

통역관 출발, 성공한 과일공급상으로

이렇게 사업이 확장 안정세에 들어가자 김형순 선생은 재산 대부분을 독립운동과 동포사업에 기부하게 된다. 리들리시는 하와이가 아닌 미주 본토에서 최초로 한인정착지가 형성된 곳이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부터 미주 각 지에서 한인공동회가 조직되며 독립운동 지원사업에 적극 나서게 된다. 리들리시가 포함된 중가주(중부켈리포니아)에서도 한인공동회(韓人共同會)가 결성되는데, 한인사회에 신망이 높았던 김형순 선생이 초대회장에 선임됐다. 선생의 동업자였던 김호 선생도 독립운동 지원에는 한마음으로 나섰다.

해방 후인 1950년에는 북미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됐고, 1960년까지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경기도 평택에 ‘꽃동산 애육원’을 설립했고, 1957년 5월 한인 실업가들을 중심으로 한인재단을 설립했다.

 

100년 지나 리들리시-통영 가교 역할

그 와중에도 그는 고향을 잊지 않은 것 같다. 캘리포니아주 한인들이 창간한 신한민보 1931년 7월 16일자(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는 ‘충무공을 위한 성금’을 기부한 명단에 가장 먼저 올라있을 정도였다. 1977년 91세로 별세한 김형순 선생의 장례식은 대한인국민회장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1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시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은 김형순 선생은 열정적이고 성공적인 사업가였으며, 한인들의 이민정착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조력자였고, 국내외 독립운동의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였다. 약100년 전에 이미 미국 주류사회에 들어갔던 김형순 선생. 그가 고향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오로지 후손들의 상상력에 맡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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