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총괄과 김영한 팀장, 市에 8개 권리 이양, 실용신안권 3개는 이미 소멸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무슨 일이던 원만하게 무리하지 않고 처리해야지 제 잘난 마냥 나서다가는 혼 날 수 있으니 조심하란 뜻이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지 않는가? 인간본연의 욕구란 막는다고 막아질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지금이 어디 왕조시대인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아 정정당당하게 뽐내고 경쟁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다. 모든 사람이 국가의 자원, 인재(人才)니까.

통영시청 안전총괄과 재해대책팀 김영한 팀장(사진.50)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그의 어린 시절 취미는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그림 잘 그리고, 무엇이든 잘 만드는 재주가 있던 꼬마 김영한은 무엇이던 남들에게 베풀고 싶어하는 소년이었지만, 시계란 시계는 분해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 다만 분해한 시계를 다시 조립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후대 역사가들이 20세기~21세기의 대한민국을 연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할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삼성그룹 故이건희 회장일 것이다. 내성적 성격인 이건희 회장의 일본 유학시절 제일 좋아하는 취미 역시 물건분해였다고 한다. 다만 분해의 대상이 자동차였고, 그의 부친이 일명 ‘돈병철’이란 소리를 듣던 사람이었다는 것만 다를 뿐.

김영한 팀장은 거제 둔덕면 농막마을 출신이다. 이곳은 유치환 선생 부친의 고향마을인 방하마을과 인접한 동네다. 초중학교를 그곳에서 보낸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빨리 먹고 살 길을 찾도록 창원기공으로 진학했다. 기계를 전공한 그였지만 졸업 후 그가 선택한 길은 토목이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학창시절 동네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은 어느 토목기사의 멘토링 덕분이다.

그런데 이 토목기사와는 김영한 팀장이 공무원이 된 후 선배공무원으로 통영시청에서 재회하는 운명의 장난질을 당한다. 아무튼 멘토 덕분에 한진중공업에 입사해서 열심히 업무에 매진하던 그에게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생겼다. 사회경험이 일천한 그에게 현장소장이란 하늘과 같은 존재였고, 감히 눈도 마주 보지 못하는 대상이었는데 그런 소장을 꼼짝 못하게 만들면서 지시하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궁금증이 도진 김영한 팀장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소장이 꼼짝 못하던 사람은 다름 아닌 ‘담당공무원’이었다. 깜짝 놀란 김영한 팀장은 마침내 진로를 바꿀 것을 결심하고, 1년여를 준비한 다음 1993년 토목직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호기심 많은 소년, 토목공무원 되다

김영한 팀장이 가장 놀란 일의 하나는 토목업무에 CAD가 전혀 사용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냥 대형종이에 도면을 그렸고, 중요한 치수와 명칭 역시 수기로 작성하고 있었다. 김영한 팀장은 치수를 손으로 도면에 기입하는 대신 워드프로세서로 출력한 명칭과 숫자를 일일이 도면에 붙였다. ‘미쳤냐? 그 짓을 왜 하냐?“는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던 그에게 ‘인간캐드’라는 별명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특유의 호기심과 경험에 따른 고집이 뒤섞이며 그의 발명욕구가 샘솟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발명해 출원한 것이 2008년 6월 쓰레기 위생보관장치다. 그가 관광과에 있을 때다. 보관용기를 개폐식으로 만들어 쓰레기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매몰형태의 보관용기 내부는 쓰레기의 무게에 따라 자동으로 오르내리도록 만드는데다, 침출수 처리장치까지 만든 이 발명품은 관광도시에 설치해 볼만하다. 아쉽지만 권리가 소멸된 지금이야 더 이상 로열티를 지불할 필요도 없으니.

한 달 뒤인 2008년 7월에는 ‘맨홀과 하수관의 연결구’를 특허출원했다. 기존 거푸집으로 만든 맨홀에 하수관이 연결되는 부분은 정밀작업이 이뤄지지 않아서 누수를 막기 위해 몰타르 작업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수분과 접촉시간이 늘면 자연스레 몰타르가 떨어지고, 결국 오폐수가 누수 되면서 악취를 유발하고 종국에는 침하와 파손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김팀장은 이 문제를 수평프레임과 승강안내프레임을 결합 구성함으로써 해결했다. 이 특허는 아직 유효한 권리다.

이밖에도 김영한 팀장은 어업진흥과에 있을 때 인공어초, 조립식 강재 인공어초를 등록했고, 악취방지형 하수구 뚜껑, 오수처리장치, 식생옹벽블록 등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이 덕분에 그는 진의장 시장 재임 시절 특진대상에도 올랐다. 담당과장이 그가 이룬 일에 대해 진의장 시장에게 보고하자, 그 자리에서 특진을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7급이던 그는 보고사실조차 몰랐고, 특진사실은 더더욱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청이 난리가 나는 바람에 알게 됐다고. 서열조직이란 원래 그런 속성이 있다. 누군가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고, 누군가의 행복은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

김영한 팀장은 결국 동료들의 질시와 시기의 대상이 됐을 뿐 아니라, 결국 특진도 하지 못했다. 당시로는 뼈아픈 기억이지만,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지금 그 상처는 다 아물었다.

그는 이후 권리를 자진해서 통영시에 넘겼다. 이 중 몇 가지 실용신안은 이미 권리도 소멸했다. 업무와 상관없이 타인 명의로 그가 등록했던 ‘고기 굽는 옹기화덕’ 특허권도 등록유지료 미납으로 권리가 소멸됐는데, 최근 모 방송에서 옹기화덕으로 고기를 굽는 음식점을 소개하기도 했다.

 

식지 않은 열정, 직접 사업은 사양

김영한 팀장의 발명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다만 자신 스스로 사업화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어느 점집에서 사주팔자를 봤더니 “당신은 절대로 사업하지 말아라”는 점괘가 나온 것도 이유지만, 스스로 생각해 봐도 사업할 체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김영한 팀장은 자부심은 있다. 특히 2009년 회원수만 90만 명에 달하는 한국건설기술인협회에서 수여하는 ‘자랑스런 건설기술인’으로 선정된 것이 그렇고, 이 선정이 경남 공무원으로는 최초였다는 점이 그렇다.

‘특진미수사건’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났다. 통영시는 과연 소속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시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도록 충분히 성원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가 아닐까? 공무원들 역시 ‘내가 그런 경우라면’, ‘남들이 그런 경우라면’ 하고 역지사지할 마음의 준비는 갖추고 있는가?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공무원 조직도 경영마인드를 도입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 지도 반세대는 흐른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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