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수필가
김병기 수필가

천만사 실버들

                             김병기 수필가

 

실버들 천만사 늘여놓고도 ∼ 언제부터인가 남강 둔치를 걸을 때면 늘 이 노래를 읊조리게 된다.

1978년, ‘희자매’가 부른 <실버들> 이라는 노래이다.

실버들을 천만사 늘여 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이 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 돌아 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

한갓되이 실버들 바람에 늙고 이 내 몸은 시름에 혼자 여위네

가을 바람에 풀벌레 슬피 울 때엔 외로운 맘에 그대도 잠 못 이루리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보고 불러 보았을 옛노래이다. 지난 해, 우연히 TV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수 ‘미라클라스’가 편곡해서 부르는 <실버들>을 듣고 아, 이 노랫말이 이리 멋들어지고 아름다웠던가싶었다. 거듭거듭 들어도 정말 시가 따로 없는 가사였고 곡조였다.

지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면 그 노래 속에 담긴 뜻까지 다 살피지 못하고 큰 감흥을 가지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서 <실버들> 가사를 해설해 주고 함께 들으면 그들 또한 이 노랫말에 빠져 들었다.

「버드나무 가지 천 가닥 만 가닥으로 늘여 놓았는데도 봄이 가는 것을 잡지 못하네. 내가 참으로 아쉬워도 마음이 변해 돌아서는 님을 어찌 잡겠는가. 덧없이 흐르는 세월에 버드나무는 늙어 가고 나는 님을 잃은 시름에 혼자 쓸쓸하게 여위어 가네. 풀벌레마저 슬피 우는 가을 밤에는 나를 버리고 간 그대도 외로워서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

정작 노랫말 지은이는 김소월이다. 또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는 등 분분하였다. 이 노랫말과 비슷한 시조가 하나 있다.

녹양(綠楊)이 천만사(千萬絲)인들 가는 춘풍 잡아 매며

탐화봉접(探花蜂蝶)인들 지는 곳을 어이 하리

아모리 사랑이 중한들 가는 님을 잡으랴

이 시조는 조선 시대의 뛰어난 재상 이원익의 시조이다. 신념과 원칙을 견지한 인물로, 청백리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변함없이 옹호한 유일한 대신이기도 하다.

이를 요즘 말로 쉽게 바꾸어 보면 이러하다.

「버드나무 가지 천 가닥 만 가닥으로 봄바람을 잡으려 하나 잡아 매지 못하고 벌과 나비가 꽃을 아무리 찾아 다니며 바라더라도 꽃이 지는 걸 어찌 할 수 없다. 아무리 깊게 사랑한다고 해도 마음이 돌아선 님은 잡을 수 없다.」

두 노래는 소재가 매우 닮았다. 이원익 시조는 버드나무와 봄바람, 벌과 나비와 꽃, 나와 님이, <실버들> 노래는 버드나무와 봄바람, 나와 님, 가을 풀벌레가 나온다. 시조는 가는 봄을 잡지 못하듯이, 돌아 서는 님을 잡을 수 없다고 한다. <실버들> 노래는 가는 봄을 잡지 못하듯 돌아 서는 님을 잡지 못하고 덧없이 세월은 흘러 가는데 나는 외롭게 시름에 젖어 있고 가을 풀벌레는 짝을 찾고 있건만 나는 그대를 만날 수 없어 슬프다. 그대도 외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고 노래한다.

예나 지금이나 따뜻한 봄바람 같은 좋은 시절은 잡을 수 없고 자신은 깊이 사랑하지만 마음이 변해 돌아 서는 님을 잡지 못하는 아쉬운 일은 같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나 지금, 이런 노래가 불러지고 있는 게 아닌가.

남강 겨울 강가에는 지금도 잎을 떨군 실버들이 늘어서 있다. 오늘도 <실버들>을 흥얼거리며 실버들 가지 늘어진 남강 둔치를 걷는다. 실버들 천만사 늘여 놓고도 가는 봄을 어이해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 (202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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