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베옷

                                                                                                         제왕국

제왕국(수필가,시인) : 통영출생, 한국문인협회ᄋ통영문인협회ᄋ 수향수필문학회ᄋ물목문학회 회원, 대구신문 시해설위원회 감수, 시집 『나의빛깔』ᄋ 『가진 것 없어도』ᄋ『아내의 꽃밭』ᄋ『무크지 0과1의 빛살(8인동인지)』

내 소싯적에는 키다리 삼으로 옷을 만드는 일이 일상이었다. 삼 메는 일이 여간 고통스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 과정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수공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 더 그랬다.

조선 아낙의 한이 두루뭉술 갈무리되어 있었다. 아낙의 가느다란 마음이 삼베옷에 올올히 배여 있는 것처럼---.

온 들녘에는 삼이 만장을 이루었고,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짜그락거리며 그 큰 키로 바람에 몸 섞어 서로 기대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서늘한 달빛의 삼 숲에는 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머물었고, 아이들 열락의 장소가 되었다.

삼 채취는 중노동이었다. 굳센 팔로 하늘 향해 휘젓고 있는 삼을 베면 하늘이 우르르 내려앉았다.

벤 삼을 커다란 드럼통에 넣고 푹 삶았다. 온 시골 동네는 삼 삶는 냄새가 구수했다. 그걸 껍질을 벗겨 선들선들 부는 바람에 말렸다. 마르면 그때부터 할머니 무르팍은 손자 베개 대신 삼이 독차지했다. 깊고 긴 고통의 밤을 지새우며 비로소 돌돌 말린 실이 물레에 감겨 실꾸리가 되었다.

그 삼은 할머니 정성이 배인 채 베틀에 올랐다.

베틀의 실꾸리는 할머니 고른 손에 잡혀 달빛 즙을 짜는 것처럼 올올히 그늘 지우며 삼베로 다시 곱게 태어났다. 더러는 쿵 하고 내려찍는 베틀에 가끔 달빛이 놀려와 소곤대고, 문지방을 흔드는 귀뚜라미 가락에 밤은 깊어갔다.

할머니 한숨과 땀방울이 슬픔처럼 깔린 베틀에는 먼저 젖고 간 바람만 흔적으로 남아있다.

그 고통의 할머니 여한을 햇빛 잣은 물레로 잣아 보았다.

 

옅게 드리운 햇살 잣는/삶의 물레 할머니 손에 들려있다//

베틀에 하루를 걸어두고/쉰다는 사실조차 멀찍이 밀쳐둔 채/귀뚜리 울음처럼 돌아가는 베틀/조선의 아낙네 노랫가락인 양/짊어진 무게가 긴 그림자 드리운다//

이렇게 낡아가는 동안/깊숙이 갈앉는 시간/그 시간 속에 아무도 모를/언약들 올올이 할머니 손끝에서/되살아나고 있다//

양손에 어진 가난을 움켜쥐고/최초인 듯 가족의 안녕을 위해/손마디마다 얽히고 설긴/고(苦)를 풀어내는 가녀린 마음//

오늘도 옅게 드리운 할머니/물레가 햇살을 잣고 있다//

-제왕국<할머니 물레>전문

 

달빛과 할머니 한숨이 소삼(蕭森)하게 내려앉아 한 올 두올 짠 삼베가 더디어 옷으로 태어났다.

그처럼 정성 들인 삼베이건만, 제대로 옷을 해 입지 못했다. 좋은 삼베는 시장에 갖다 팔고 두툴두툴 불평불만만 섞인 삼베로 옷을 지어 입었다.

하지만 삼베옷이 원체 보리 이삭처럼 깔끄러운 데다가 촌놈 표가 나는 것이 싫어 할머니 꾸지람을 들어가면서도 한쪽에 팽개쳐 두는 날이 많았다.

가난의 대물림처럼 이어지던 삼 삼는 일은 이젠 먼 추억의 한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고, 삼베 또한 값비싼 골동품으로 변해 먼 기억 속으로 나를 수척하게 몰고 갈 뿐이다. 그리고 서민과 희로애락을 같이한 삼베가 아닌 부귀영화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월의 아픈 잔등은 현대라는 괴물에게 삼켜지고 말았다.

나는 그 대물림의 삼베옷이 지금도 내 옷장에 가지런하게 놓여있다. 내 굴곡진 인생처럼 그렇게 삭아가고 있다.

 

제왕국(수필가,시인)
제왕국(수필가,시인)

제왕국(수필가,시인) : 통영출생, 한국문인협회·통영문인협회· 수향수필문학회·물목문학회 회원, 대구신문 시해설위원회 감수, 시집 『나의빛깔』· 『가진 것 없어도』·『아내의 꽃밭』·『무크지 0과1의 빛살(8인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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