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점차 걷히며 푸르스름한 기운이 하늘로 퍼진다. 야근한 달빛이 스스로 퇴근을 서두르는 시간, 새벽의 다른 이름. 누군가는 시작이라는 이름으로 깨어남이 될 수도 있는 시간인 틈새, 찰나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파란시간’이다. 밤새 천상의 비밀을 공유했던 이슬방울들은 파란시간의 예고로 증거를 없애고자 한다. 동이 트면 그녀들은 흔적 없이 하늘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중첩되는 산 너머로 태양이 자신의 영역을 드러낸다. 그렇게 파란시간의 찰나를 잠식한다. 붉은 태양빛이 산과 바다를 향해 포효하듯 과시하려 할 시점 이미 파란시간은 스스로 소멸의 길을 걷는다.

결코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주연인 밤과 낮 사이에 잠깐 등장하는 카메오다. 나는 이 카메오의 파란시간을 좋아한다. 충분히 나를 몰입하게 만든다.

모닝커피라 이름하며 아파트 창 너머로 커피 향을 보낸다. 주문자는 없었지만 수신자는 ‘파란시간’이라는 밀어가 닿았기 때문에 바람 부는 방향으로 커피 잔을 내어놓는다. 나의 후각을 스치고 커피 향은 그대로 허공을 향해 출발한다. 산자락이 먼저 맡을지, 바닷자락이 먼저 마실지 알 수 없지만 커피는 내 마음자락을 데리고 새벽하늘을 향하자고 한다. 가끔 파란시간을 만날 수 없는 ‘흐림’으로 깊이 침묵하는 새벽하늘을 마주할 때면 커피는 더 진해진다.

붓끝에 먹물이 닿아 ‘여명黎明, 단명旦明, 여단黎旦’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나는 무턱대고 그릴 수 있고 적을 수 있는 ‘파란시간’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커피 한잔과 하늘과 나는 밀담을 나눈다. 어느새 아침이 된다. 별반 없는 하루를 시작한다.

파란시간 둘, 해 질 녘.

여름 해는 성수기다. 겨울 비수기 때 달에게 덜 미안하기 위해서는 어느 시점까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다닌다. 일찍 나와야 하고 늦게까지 머물러야 하는 부지런함을 떨어야 한다. 하지만 목적의식으로 부지런함에만 치우쳐서도 안 된다. 물놀이 나온 아이들이 춥지 않고 신날 수 있게 스스로를 연소해야 한다. 열매가 타들어가지 않도록 조율하는 지혜와 배려도 잊으면 안 된다.

때로는 주간근무가 야근자보다 힘든데도 ‘어둠’이라는 외로움을 이겨야한다는 이유로 해 뜰 녘이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는 억울함도 견뎌야 한다. 새해 첫날 일출이 대중들의 환호 속에서 뽐낼 때 섣달그믐날의 해 질 녘 일몰은 차분히 돌아앉는다. 파란시간의 일몰이 잔망스러웠던 하루의 잔가지를 기꺼이 꺾어야 새해가 오기 때문이다.

‘지치다’ 동사와 마주하는 시간, 해는 듣는 이 의식하지 않고 산자락과 바닷자락에 하소연을 시작한다. 역시 해는 언변가다. 어느 사이 온통 그의 하소연을 듣고자 몰려든 기포들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인다. 바다도 산도 붉은 색깔의 세상이 된다.

잠깐의 침묵, 한바탕 서럽도록 토해낸 해가 점차 진정하며 서서히 소멸하고자 할 때 파란시간의 존재가 드러난다. 해를 방안으로 넣는다. 달을 방문 밖으로 불러낸다. 파란시간 하나가 양보했던 시간들을 파란시간 둘은 찾아간다. 파란시간 하나가 뽐냈던 시간에 파란시간 둘은 스며든다.

매일 만나는 일상 속에서 오롯이 ‘나’만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 나를 가두거나 풀어놓을 수 있는 미완의 시간 상태인 이 틈이 나는 좋다. 하루는 12시간씩 짝을 이루는 데칼코마니라 부르고 싶다. 낮과 밤, 정오와 자정, 해 뜰 녘과 해 질 녘.

억지가 통했던 노란시간, 순수라 불렸던 하얀시간, 꽃봉오리 같던 분홍시간, 열정을 쏟았던 빨간시간, 서러움이 밀려왔던 잿빛시간…. 녘으로 향하는 시간은 붓끝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강약조절, 물의 흐름에 따르는 삶이고 싶다.

파란시간은 시작과 끝을 위한 마중과 배웅의 시간임을 우리는 안다. 엄마의 자궁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온 그 순간이 어쩌면 내가 처음 접한 파란시간의 실체였는지 모른다. 내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또 하나의 파란시간일지 모른다. 간극 속에서 다른 듯 닮은 시간은 흘러왔고 흘러 갈 것이다.

 

 

백란주(수필가)
백란주(수필가)

백란주(수필가) : 수필과 비평 등단, 통영문인협회·수향수필·물목문학회·경남수필과 비평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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