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를 넘기며 자라온 세대들은 누구에게나 유년시절의 이야기꺼리, 한 웅큼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리운 어머니의 정보다도 더 애련하게 떠올라 추억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애틋함이 또 있을까마는, 아직도 어린 시절을 사로잡아버리는 꽁보리로 밥을 지을 때 위에 조금 얹어 안치는 웁쌀의 추억은 각별하다.

수업을 마치면 곧장 외갓집으로 쌀을 가지러 가야하는 심부름이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잘 만들어진 팽이를 들고서 우쭐거리며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느닷없이 뭉둥이가 어머니의 손에서 춤을 추며 나를 쫓아오는 거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숨이 넘어갈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경험상 어머니에게 잡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뛰어야했다. 달리기만 큼은 어머니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한참을 도망하여 거리를 넓혀 가면서도 왜? 내가 몽둥이에 쫓겨야 하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허리춤에 달라붙어 덜렁거리는 책 보따리를 보는 순간, 아침에 어머니께서 챙겨준 하얀 쌀자루가 떠올랐다. 내일 아침 동생 생일에 쓰여 질 웁쌀을 좀 얻어오라는 거였는데, 그만 팽이 만들기에 시간을 다 보내버린 것이다. 쫓겨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쌀을 가지고 들어가야 했다. 뉘엿이 넘어가는 짧은 저녁 해를 바라보며 외갓집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았다. 두 시간은 잡아야 갔다 올 수 있는 거리다. 도깨비가 나타난다는 숲속의 오솔길을 통과하는 구간이 문제였다. 깜깜한 밤, 호젓한 길을 혼자서 돌아올 것을 생각하니 무서워서 자신이 생겨나지 않았다. 낮 시간 내내 팽이 만들기에 몰두했던 친구를 불러내서 같이 갈까도 생각했지만 동행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조금의 바스락거림에도 머리끝이 곤두서는 어둠이 깔린 숲 속에서 정말로 무언가 기척이 느껴졌다. 헉! 비명이 절로 나왔다. 이미 열 살 나이로는 감당해 낼 수 없는 공포가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데다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인기척까지 들려오고 있으니, 어른인들 피할 방법이 있을까. 죽은 채 숨어서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무슨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루한 시간이 온몸을 휘감았다가 스르르 풀려놨을 즈음 정신을 차렸다. 흰 포대를 지게에 짊어지고 저만치 어른이 가고 있었다. 흐릿했지만 분명코 아버지 걸음걸이였다.

“아부지이~”

“으, 흐흠~”...

으슥한 밤길을 나선 말썽꾼이 그래도 기특했던지 모든 걸 용서하는 분위기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한 순간에 일거양득一擧兩得을 보게 된 새하얀 기쁨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식은땀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애벌로 삶아 하룻밤을 잠재운 꽁보리. 그 위로 위용을 자랑하며 새하얀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던 웁쌀. 아버지 밥과 동생 생일 밥을 푸고도 그날은, 흰 쌀이 섞인 보리밥을 얻어먹을 수 있게 해 주었던 무쇠솥 속의 새색시. 대바구니 속 삼베 덮개를 걷어내면 어쩌다가 옥수수 술빵이나 보리개떡이 함께 들어있던 횡재보다는 덜했지만, 웁쌀의 위력은 식구들 앞에 내보이기 부끄러운 어머니의 기분 좋은 피난처 역할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년시절을 주눅 들게 했던 주범이 또 다른 소원성취의 희생으로 바쳐지는 지금은 풍성함을 고민해야 하는 애물로 위상이 전도顚倒 되어버린 느낌이다.

절치부심切齒腐心, 보리의 반란인가(?) 웁쌀의 막강한 위용을 잠재우고 건강 곡류로 각광을 받으며 ‘오색 칼라’로 무장하여 다시 태어나고 있는 요즈음이다.

처마 밑 시렁에 매달려 아침·저녁 식구들을 기다리던 꽁보리가 보리쌀로 위상이 높아지도록 하얗게 자리를 놓아주던 웁쌀.

그 이름도 이제 세월의 흔적으로만 기억 될 것인가. 보리밭 축제길 사이를 수놓은 각양각색의 사람들, 웁쌀의 애환을 알 듯 모를 듯 꽹과리 소리만 요란하다.

 

박길중(수필가)
박길중(수필가)

 

박길중(수필가 / ☎010-6261-0100) : 경상대학교대학원 한문학(동양고전학)석사, 2017년[수필과 비평] · 2019년[현대시조 봄호] 등단, 통영문인협회 · 수필과 비평 작가회 · 경남문인협회 · 경남시조시인협회 · 사)한국시조협회 · 통영 시조회 · 통영문인협회 · 수향수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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