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희(수필가/통영문인협회 회장 )

통영시 중앙동 78-4번지는 친정집 주소이다.

태평동에서 이사해서 막내 동생이 그 집에서 태어났다. 동생나이가 50이 넘었으니 반백년의 세월을 지낸 소중한 추억의 장소이다.

아버지 나이 여섯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니혼 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고향에 와 그 당시 통영읍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유학시절 고생으로 얻은 결핵이 악화되어 사흘 출근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본가가 있던 굴(해저터널) 앞에서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결식을 하였단다. 그 자리에서 고별사를 한 친구의 아들은, 후에 통영수대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같이 일본에서 공부한 할아버지의 생질, 아버지의 고종사촌 형님은 나중에 충무시장을 지냈다. 집안 왕고모님이나 큰집 어른들은 노동으로 뼈가 굵은 아버지만 보면,

‘우리 ○○가 지 아버지만 살았어도 이런 고생을 안 할 텐데 ··· ’하고 안타까워 하는 말씀을 하였다.

모친과 동생을 책임 진 소년은 건축을 전공한 부친의 영향인가 목수가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 집 짓는 공사장에 아버지의 점심 심부름을 한 적이 많았다. 항고라는 군대식 밥그릇의 도시락을 받아 들며, 귓등에 연필을 꽂은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곤 했다. 그러다가, 목수일은 비오면 공치는 등, 수입이 일정하지가 않아 시내에 가게를 얻어 목공소를 차리셨다. 세를 얻어 일을 하다 보니 자리가 잡힐 만하면 집을 비워 달라 해서 고심 끝에 빚을 많이 얻어 산 집이었다. 그 빚을 갚느라고 무진 고생을 한 부모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목공소」라고 간단한 간판을 건, 우리 일곱 식구의 생계가 걸린 아버지의 일터에서는 늘 망치소리가 났다. 이층 내 방에서 들으면서 저 소리가 ‘아버지의 소리’로 뇌리에 남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올곧았고 성실했다. 언젠가 한 번 내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나중에 아버지가 죽고 없더라도 우체국 필경대나 세무서 필경대를 보고 아버지 생각을 하거라.”

아버지는 주문 받은 제품을 만들면서 이걸 나중에 내 자식들이 보리라하는 마음으로 만드신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 관공서의 물품을 동네 목공소에 주문하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그 당시에는 작품을 남긴다는 마음으로 물건을 제작하신 것이었다. 나이가 연로해지고 목공소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갑자기 돌아 가셨다. 계단이며 문짝 하나하나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집, 잠시 외출을 한 듯,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수 없는 친정집이었다.

몇 년 전, 통제영 복원 사업계획이 발표되고 이웃집들이 헐리고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런데 남문자리가 발굴되었다더니 남문건립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남문 앞 광장을 위해 우리 집이 철거대상이 되었다. 시청에서 날아 온 공문에 구순을 앞 둔 어머니는 심장이 두근거려 못 살겠다고 심란해 했다. 감정평가사가 오가고 하더니, 결국 시가에 훨씬 못 미치는, 공시가에 준한 가격으로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고 어머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고가 사다리를 타고 이삿짐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 어머니는 되뇌이셨다.

온 가족이 가지는 서운함과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을 보니 느닷없이 그 집이 근대문화유산에 등록이 되었다고 했다. 옆집과 보상협의가 되지 않아 남문 계획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10년 후에나 세우느니 하는 기사가 났다. 세우지도 않을 남문이면 왜 남의 집은 그렇게 했단 말인가. 우두망찰 집을 빼앗긴 기분이 드는 건 뭘까. 이러면 행정에 협조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었는가. 지날 때마다 함석에 둘러싸인 집을 보면 가슴이 아린다. 보상가를 싯가로 요구하며 배짱을 부렸다면 그 집에 그대로 살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이래서 데모를 하고 떼를 쓰는가 보다. 소시민의 억울함은 어디에다 하소연을 해야 하는가.

유영희(수필가) :  《수필과 비평》신인상. 수필집 《옹기의 휴식》. 시집, 유담 《각자 입으로 각자 말을 하느라고》. 수향수필 문학회회장 역임. 현 통영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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