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과 대한민국 통영이 깊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런데 인연을 만들어 준 뒷이야기는 초라하다 못해 눈물 날 만큼 안쓰럽다는 평가다. K-컬쳐가 글로벌 대세가 되는 와중에 누가 먼저 원했던 두 나라, 두 도시간의 교류는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해도, 이미 통영시와 인연을 맺은 다른 국제교류도시들 가령, 일본 사야마시·타마노시·중국 롱청시·윈푸시·미국 리들리시·UAE푸자이라시·러시아 사마라시에는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16세기 조선의 군항(軍港)으로 건설된 군사계획도시 통영 그리고 포르투갈의 16세기 전성기 대항해시대를 이끈 군항이자 수도(首都)인 리스본, 두 나라의 대표적인 역사도시로 당당히 어깨동무를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이란 비판이다. 어떠한 역사적 맥락도 없이 단지 수년 전 어느 교수가 주장했을 뿐인 사람, 잠시 기록에 등장했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종적을 감춘 주앙 멘데스라는 자에 대해 현대의 우리가 부화뇌동할 하등의 이유가 뭐냐는 것. 사실 지완면제수(之緩面第愁)로 알려진 그 이름조차 우리의 추측일 뿐인데.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한 외국인이 어디 주앙 뭐시기뿐일까? 주앙이라는 인물은 1604년 통영에 표류해 왔다고 전한다. 1604년이라면 이경준 통제사가 지금의 위치에 통제영을 건설키로 결정했지만, 아직 완공은 하기 전이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과 교류를 끊었던 조선이 침략전쟁에 불참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의 간청에 응해 화친약조를 맺은 게 1607년이다. 주앙은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에 탔다가 풍랑을 만나면서 통영으로 표류하게 된 여러 선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표류한 자로 명나라 사람 16명, 일본인 32명 외 1명의 흑인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탈출해 버렸다. 이게 전부다.

왜 그렇게 통영이 ‘서양인이 조선에 도래한 최초의 장소’가 돼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양읍 당포에 ‘최초 서양인도래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를 세운 시기는 2006년.

하지만 주앙보다는 뒤라도 우리나라와 좀 더 깊은 역사적 인연을 맺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박연이다. 그렇다. 그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이름이 얀 아너스 벨테브레였지만 조선식으로 개명할 만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에 대한 기록도 훨씬 더 상세하다. 박연은 네덜란드 리프 지방에서 태어나 1626년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아시아로 왔다가 이듬해 우베르케르크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제주도에 도착했다. 동료 기스베르츠, 피에테르츠와 함께 조선 관헌에 잡혀 1628년(인조 6년) 서울로 압송됐다. 이후 동료들과 훈련도감에서 총포 제작·조종에 종사했다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참전했고, 박연의 동료 2명은 전사까지 했다. 박연은 조선여성과 결혼해 1남 1녀를 뒀으며, 원산박씨의 시조다.

박연이 조선에 정착한 지 27년 만인 1653년(효종 4년) 네덜란드 출신 하멜과 36명의 일행들이 제주도에 표착했고, 이때 박연은 제주도로 가서 통역을 맡으며 관헌을 지휘했다고 한다. 박연은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됐다가 병영 이송되기까지 3년 동안 함께 지내며 조선의 풍속과 말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멜은 주로 전라좌수영에서 잡역을 하다가, 조선생활 13년 만인 1666년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고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저술한 <하멜 표류기>는 한국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책이 됐다.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역사적 맥락이 있고,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통영의 역사적 배경과 자산, 문화·예술적 유산정도면 굳이 최초의 서양인이 찾은 곳이 아니어도 충분치 않을까? 이렇게 억지 쓸 필요 없이.

선조31년(1598년) 5월 26일 실록에는 서양인이 등장한다.『유격(심유경)이...또 말하기를 “데리고 온 얼굴 모습이 다른 신병(神兵)을 나와서 뵙게 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지방 사람이며 무슨 기술을 가졌소이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 사람입니다. 바다 셋을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여 리나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鳥銃)을 잘쏘고 여러 가지 무예(武藝)를 지녔습니다.”』

여기서 파랑국은 포르투갈을 의미한다. 주앙 뭐시기는 표착한 하급선원이지만, 이 인물은 심유격이 직접 선조에게 소개할 정도다. 선조는 이틀 뒤 흑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벌이는 무예를 감상하고 선물까지 하사했다.『해귀 3명이 뜰아래에서 배알하니, 상이 칼솜씨를 시험케 하고 상으로 은자 한 냥을 주었다.』

아무리 부인하려해도 조선 땅을 밟은 서양인은 임진왜란 때가 먼저다. 조선 침략군 제1선봉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에 가장 먼저 상륙했고, 한양성과 평양성을 제일 먼저 점령했으며, 용인전투에서 조선관군에 참패를 안겼으나, 한산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혼쭐이 난 왜장이다. (※바로 잡습니다. 한산대첩에서 혼쭐이 난 장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입니다. 와키자카가 고니시 유키나가 예하에서 용인전투에 출전한 것은 맞습니다. 해전에서 연전연패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원래 수군이었음에도 육지전투에 참여한 와키자카를 남해안으로 보낸 것입니다. 편집자註)

전쟁 발발을 조선조정에 경고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기도 한 고니시가 천주교도인 것을 아는 사람은 적다. 그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이며, 집안문장(家紋)조차 십자가 모양이다. 독실한 크리스챤인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선교사를 데려왔는데, 그의 이름이 그레고리우 데 세스페데스 신부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서 작성했던 편지 4통이 <선교사들의 역사>라는 책에 기록돼 있는데, 편지에서 그는 조선을 꼬레이(Coray)라고 적었다. 일본에서 부르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서양에 알려진 이름 그대로다. 현존 기록상, 가톨릭 성직자 또는 유럽 선교사로서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사람이 바로 그이며, 그가 주로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왜성 앞에 그를 기리는 세스페데스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편지에서 “소규모로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익숙한 지리를 활용해 매복공격을 가해 일본군을 도륙하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취했다”고 조선의병의 용맹한 모습을 묘사했다.

이 기록은 침략 일본군과 인연을 가진 것이라 인정할 수 없다고? 그럼 선조15년(1582년) 1월 1일 수정실록을 보자.『요동 금주위 사람 조원록 등과 복건 사람 진원경, 동양사람 막생가, 서양사람 마리이(馬里伊) 등이 바다에서 배로 우리나라에 표류하여 왔는데...(이하 생략)』마리이 역시 포르투갈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영기 통영시장은 지난 10월 18일 포르투갈 출장길 리스본 자르딤 두카스 다 폰테 공원서 열린 주앙 멘데스 기념조형물 제막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김미옥 의장, 카를루스 모에다스 리스본 시장, 조형물 제작가 빌스 외 동포 및 언론인도 참석했다. 작가가 제작한 남녀 한 쌍 조형물 중 남성상은 통영에 설치돼 우정을 기리기로 했다 한다.

포르투갈 국영방송과 현지신문에 뉴스 취재보도된 것에 천영기 시장은 한껏 고무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라는 비판도 직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통영시는 남성상 조형물이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기존 주앙 멘데스 기념비가 세워진 삼덕항 일원에 설치하고, 이 일대를 소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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