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癸卯年) 2023년. 올해는 12간지에서 토끼의 해이자, 60갑자 중에서 마흔 번째로 흑토끼의 년(年)이란다. 토끼는 우리나라 전래 이야기 속에 다양한 배역으로 등장한다. 낚시를 한다거나, 참새를 잡게 해 준다는 현란한 말솜씨로 호랑이를 골탕 먹이거나, 심지어는 간을 별도장소에 보관 중이라는 기막힌 임기응변으로 용왕님을 농락하는 듯하다가, 거북이와의 경주에서는 상대를 얕잡아보는 허세꾼에서부터 보름달을 온통 독차지하고 떡방아를 찧는 ‘스페이스 래빗’에 이르기까지. 지난 120년 토끼띠의 해에 일어났던 우리나라, 우리 고장의 역사를 살펴보자.<편집자 註>

 

O1903년 계묘년(癸卯년)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 및 아시아에 대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일본제국이었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삼국간섭)으로 제지를 당했다. 이에 조선민중은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 독립문 건설로, 조선조정은 대한제국 선포로 나라의 민족의 운명을 일으켜 세우려했다.

미국 프로야구 첫 월드시리즈가 보스턴에서 개막했고, 보스톤이 초대 챔피언에 올랐던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했던 이 해, 광무7년이던 대하제국의 운명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원래 군사계획도시로 건설된 통제영이었던 만큼, 통제영이 폐영(1895)되고 통제사가 사라지자 통제영 내 관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민정을 되살릴 수 있는 해결책은 오로지 설군 밖에 다른 방도가 없음을 호소한 끝에, 마침내 진남군을 설치(1900년)했다. 고성군의 도선․광이․광삼 등 3면과 거제군의 가좌․한산 2섬에 이전까지 통영에 속했던 여러 섬을 합쳐서 별도로 만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러 후속 행정처리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고종 황제의 칙령이 반포됐음에도, 관할구역 일부가 진남군에 편입하게 된 거제와 고성 양군이 경계를 나누는데 원한을 품고 각부(各部)에 일을 꾸며서 그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진남군의 아사(衙舍. 관료사무실)는 새 군수가 서임될 때 이전 통제영과 우후영에 설치해 정하라는 훈령이 내려왔으나, 초창기엔 청남루(淸南樓.남문) 밖 전영(前營)의 공해 중에 설치했다. 1903년 8월 부임한 박일헌(朴逸憲) 진남군수가 이듬해 2월에 우후영으로 관아를 옮겼고 아사와 공해를 새로 수리하여 군의 모양새가 자못 정돈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진남군의 신설 과정은 그야말로 산고와 같았으며, 통제영 폐영 이후 만 5년 만에 지역 특성을 되살린 설군(設郡)이 가능했던 것은 수년간 통영의 옛 위상과 지역적 독자성을 되살리고자 애쓴 지역 유지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당시 통영은 수산업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반면 농업은 낮은 수준이었다. 이 해 공업부문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해에 공업부문의 다양한 발전과 함께 군립공업전습소가 설립됐다. 올바른 기술전수를 위한 것으로써, 지금의 항남동인 통영면 길야정(吉野町 항남동)에 위치했다.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박상건(1903~1945), 국내항일운동에 가담한 박태근(1903~1955), 반영기(1903~1977) 등 통영출신 독립운동가들이 태어났다.

 

통제사의 집무실이 있었던 세병관 앞의 망일루 모습. 통제영은 1895년 폐영됐다.
통제사의 집무실이 있었던 세병관 앞의 망일루 모습. 통제영은 1895년 폐영됐다.

 

O1915년 을묘년(乙卯년)

3월 토지조사령을 개정하고, 12월 광업령을 공포하는 등 식민지 수탈을 위한 조치를 착착 진행되던 1915년, 이해 정월 경상도 유림들과 지사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에 통영의 서상환(徐相懽), 서상호(徐相灝) 등이 가담해 활동했다. 통제영의 고장으로 무너진 왕국의 혼을 계승한 자부심 넘치는 통영이 3․1운동 이전부터 조직적인 항일운동과 긴밀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 동경에서 유학 중 1933~4년 일본의 조선홍색공회 회원으로 활동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남기동(1915~1942)이 이해에 통영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 망명 후 남경으로 가서 조선의열단에 입단하는 한편, 1935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10월 중국 남경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제3기로 졸업한 뒤 만주방면으로 파견되어 훈련공작을 수행했다.

중앙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제6기생으로 졸업 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의 결성 시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자, 1941년 5월 조선청년전위동맹 제2구대 제5전구사령부 정치지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1942년 조선의용군과 중국 팔로군 제1여단에 배속돼 대일공작을 전개하던 중, 같은 해 5월 전사 순국했다. 정부는 2001년 고인에게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통영지역 금융조합이 1월 19일 설립허가를 받았고, 조합장은 김기환이었다. 어업에 비해 열악했던 농업이었지만, 지주 및 소작인의 상호이익을 증대시키고 농업개량 발달 등을 꾀하기 위해 통영군지주회가 2월 8일 조직됐다. 논 100두락 논밭 합하여 150두락 이상을 지닌 지주 54명이 회원이었으며, 회장은 김삼주(金三柱), 부회장에 김진현(金晋鉉)이 맡았다.

통영군지주회 회장 김삼주 선생이 바로 판데목에 있던 나무다리 굴양교를 철거하고 사재를 털어 아치형 돌다리 착량교(鑿梁橋)를 세운 분이다. 당시엔 태합교(太閤橋)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태합은 일본말로 ‘타이코’라고 하는데, 조정의 관직명이지만 가장 유명한 타이코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가리키는 용어란 점은 아쉽다.

수필가이자 집안대대 궁중음식을 전승한 전통요리장인으로 유명한 제옥례 선생이 이해 6월 19일 태어났다. 한국예총 예술문화공로상, 경남문인협회 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한국예총 통영지부장, 통영문인협회, 수향수필문학회, 늘빛여류문우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통영의 문화예술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통제사 음식과 관련된 식재료와 조리법을 체계적으로 정리, 기록으로 남기고 음식을 재현했던 그녀는 2015년 12월 1세기를 넘는 나이(101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봉회 선생(별세1969.5.22)이 12월 22일 도천동에서 태어났다. 대한어망공장과 통조림공장을 설립해 크게 성공한 사업가이자, 자신의 성공을 지역민과 나눈 헌신적인 봉사자였다. 두룡초, 통영여고, 통영고 건립 시 수많은 학교부지를 희사해 통영의 후진육성에 힘썼으며, 충무상공회의소 회장을 10년간 역임하면서 지방상공업계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89년 충무시문화상 지역사회개발 부문 수상자다.

 

1915년 착량교 모습
1915년 착량교 모습
현 중앙시장인 부도정 시장의 모습
현 중앙시장인 부도정 시장의 모습

 

O1927년 정묘년(丁卯년)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8년이 흐른 이해 2월 이상재 선생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인 민족주의자가 힘을 합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됐다. 그런데 이상재 선생이 한 달여 뒤 사망하는 불운을 겪는다. 일제는 3월부터 일본사 교과서 명칭을 ‘국사’로 개정하며, 민족혼 파괴 작전에 들어갔다.

정치인들의 망언은 시대를 막론하고 민중의 분노를 산다. 정치인의 망언은 자신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서 기인하는데, 이런 사례는 고금이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통영 출신 정치인발 초대형 설화(舌禍)가 식민지배에 신음하는 전국 민초들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거의 2년이나 떠들썩했던 김기정 사건(金淇正 事件).

3월 15일 이른 아침 24살의 열혈청년 김원석이 ‘매족상습범 김기정을 징토하노라’는 제하의 유인물을 통영전역에 살포했다. 여기에는 “김기정은 도평의회 석상에서 ‘보통교육을 폐지하라’, ‘조선은 교육으로써 망국했다’, ‘조선어 통역을 철폐하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 자”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는 사실이었다. 재력을 갖춘 변호사로 관선 경남도평의회 의원이었던 김기정이 전년도말 제안된 ‘1면1교제(한 면에 보통학교 하나씩은 있어야 함)’에 대해 비판하며 했던 발언이 문제였다. 그는 “무슨 소리냐? 조선 사람에게는 교육이 필요치 않다. 조선사람은 보통학교만 나오면 사상이 악화 되어 사꾸라 몽둥이를 끌고 다니며 불량한 짓을 하고 사회운동의 선봉이 된다. 지난 1919년의 소요 이래 당해 보지 않았느냐? 조선은 교육으로 망했다”는 망언을 지껄였고, 여기에 한술 더 떠 “도평의회에 조선어 통역을 철폐하자. 황국어(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도평의원 자격이 있는가?”라는 말까지 했다.

김원석은 유인물을 살포한 날 저녁 김기정의 집을 찾아가 ‘사죄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기정은 딱 잡아떼며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실랑이를 벌이던 과정이서 김원석이 김기정과 함께 있던 일본순사 앞잡이 허기엽을 구타하자, 이틀 뒤 허기엽의 고소로 김원석은 구속돼 버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통영전역이 들끓었다. 불교포교당 통영청년단을 중심으로 꾸린 진상조사위에서 경남도 평의원들을 만나 진상을 알아본 다음 3월 25일 봉래좌에서 시민들에게 직접 보고했다. 극장에 가득했던 600여 명의 시민들은 김원석의 징토문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됐고, 나아가 김기정 의원이 조선인의 학교설립 신청은 반대하면서 일본인의 학교설립 신청은 찬성한 이율배반적인 태도 외에도 오히려 일본인 평의원이 1면1교제와 경남도평의회 조선어통역 유지를 찬성한 사실까지 알게 된 것이다.

이후 김기정 사건은 통영시민들의 시위로까지 번졌고, 일제경찰과 충돌하기까지 이르게 됐다. 통영경찰서 다무라 서장이 통영청년이 던진 돌맹이에 얼굴을 맞아 앞니가 부러지는 일도 있었고, 김기정이 몰래 피신한 후 그의 집으로 들이닥친 군민들이 가재도구를 박살내기도 했다. 통영 거주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만들었지만, 통영군민들은 이들만큼은 손도 대지 않았다. 통영군은 거의 계엄상태가 됐다. 5월 15일 김기정이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일본으로 피신한 것으로 소문났다. 김기정 사건으로 인해 재판을 받은 통영군민은 30여 명이나 됐고, 이듬해까지 이어진 이 재판은 전조선인의 이목을 끌었다. 실로 놀라운 통영군민들의 민족자주의식의 표현이었다.

서호항 서만 매립공사가 6월에, 산양면 도남리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7월에 각각 준공됐다. 이해 5월 해저도로(해저터널) 공사에 들어갔으며, 6월 중앙시장이 통영군이 관할하는 공설시장으로 인가됐다. 욕지도 개시장이 선 것도 이해다.
 

제옥례 선생
제옥례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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