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자 / 이국민

 

기후위기! 이 위기는 기후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 문화에도 많은 고충을 안겨준다. 최근 동랑의 친 동생 청마출생지 문제로 통영에 고향을 둔 문화인들에게 많은 고충을 안겨주면서 새삼 떠오르는 20~30여 년 전 한 여름철에 듣고 본 것을 정리하고자 한다. 당시에도 통영에서 전업 작가로 글 쓰면서 살아보려고 전전긍긍할 때 공학박사 출신의 어느 선배의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나 여태까지 교과서에 나온 희곡 몇 페이지 읽어본 후, 처음으로 자네가 쓴 희곡 한편, 읽었네. 희곡이란 게 참 복잡 더구나!"

그리 길지 않은 한마디였지만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또한 희곡을 쓰는 지역작가의 애로사항과 '단절성'을 한꺼번에 나타낸 말투였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나 보다. 어느 선생님께서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하면서 시학詩學에 대해 잠시 언급했다. 나는 그때부터 남몰래 시를 쓰고 시 읽기를 좋아했으므로 시학詩學이란 단어에 상당히 관심이 갔다. 결코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책은 구해 읽어보지는 못했다. 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한 후 제일 먼저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 책을 구해 읽었다. 당시 참 어려운 책이었다는 기억과 어려운 개념들을 노트에 적어가며 천천히 읽었다. 물론 시험 문제나 과제는 아니었지만, 시학이란 제목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놀랍게도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시詩에 대한 설명이 아니고 고대 희랍"희곡"의 구성이나 등장인물 설정 그리고 대사의 의미 등등이 쭉 설명되어 있었다. 그 후 나는 "희곡과 시"의 관계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집중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 역시 과제도 시험과목도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화두였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희랍시대의 희곡작가는 거의 다 시인이었으며 희곡 작품 속의 대사 역시 시어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대사를 시적詩的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 시대부터 영국의 셰익스피어까지 희곡의 대사는 시적 문학성이 상당히 깊은 시어로 씌어져 왔다. 셰익스피어도 고대 희랍 희곡의 영향을 아니 받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 역시 따로 시집을 두 권 낼 정도의 문호였다. 당시의 희곡과 시의 관계란 모태가 같은 형제자매의 관계였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나라에 있다. 우리의 희곡 역사는 정말 짧고 애매한 정도이다. 시는 오래전부터 쓰이고 읽혔지만, 희곡은 고대 한국 문학사에서 판소리 대본을 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내가 북경의 자금성을 여러 번 참관하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자금성뿐만 아니라 이화원에도 궁궐 제일 깊은 곳에 극장이 있다는 것이다. 화려한 무대와 분장실 소품 진열대와 대기실 등을 보고 정말 놀랐다. 중국 북경에서 발달한 경극京劇은 서양에서도 부러워할 만큼 많은 레퍼토리와 오페라 적 구성으로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 북경오페라의 대사 역시 심금을 울리는 시詩로써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 고대문화 가운데 이가 빠진 듯 하나가 쏙 빠져있었는데 그것은 희곡이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수준이나 현재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여야만 발전할 수 있는 계기와 번영의 초석이 된다. 말로만 문화민족이 아닌 결손 된 문화영역을 보충, 보완하려는 피나는 노력 없이는 무엇인가 부족한 문화 장애를 극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늘 “우리 작가 살리기”와 “우리 작가 아끼기” “우리 작가 사랑하기”를 부르짖고 이 외로운 투쟁과 외침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커다란 검은 그물의 그림자를 피하려고 애쓰며 생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검사”나 “기자”를 사칭하면 당장 법적 제재를 받지만, 작가나 시인을 사칭하면 오히려 멋쟁이로 통하는 현실! 중요한 것은 멋과 낭만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풍습이 지역사회에서 지역작가가 뿌리내릴 수 없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1996년도 일이었나 보다. 나는 지역 어느 문화재단의 요청으로 잠시 회보발간을 도운 일이 있다. 사무실 면적은 좁지 않았지만, 임시로 출근하는 내 책상이 없는 관계로 작업할 적당한 장소를 살펴보다가 나는 창고로 사용하는 옆 사무실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 당시도 여름이었던 탓에 더운 공기만 꽉 차 있어 창문부터 열고 환기를 시키며 자리를 잡고 있는 중 구석진 곳에 알 수 없는 물체가 흰 종이에 덮여 있는 것이다. 나는 호기심으로 가까이 가서 그 물건을 살며시 들추어 보았다. 그 유명한 동랑의 모습이 상반신만 근엄하게 누워있던 것이다.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비록 생명체가 아닌 암청색 청동 종유의 물질이었지만 그것은 섬세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머리부터 상반신 전체를 드러낸 시신보다 더 섬뜩하게 나를 바라본다. 그 동랑흉상을 만나는 순간 삽시간에 처절함과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슬픈 생각이 내 가슴을 눌렀다.

“산 작가와 죽은 작가와의 만남”

한 고향에서 태어나 한 가지 문학 장르를 전공한 굴절된 시대의 희곡작가! 난 며칠 동안 잠을 설쳐야했다. 작가 자신의 작가관이 왜 정치적 내지는 사회적 이념 아래에서 매장당하고 매도당해야 한단 말인가? 공연 문화는 지원 없이 관객 없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지역 사람들은 특정 인물에 대한 연구나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 특정 인물이 작가라면 더욱더 혹독하다. 99편의 작품이 항일이고 애국이라도 딱 1편 친일적 소지가 있으면 친일 작가로 매도되어 왔다. 독일의 문호 괴테와 음악가 베토벤 그리고 이웃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다 동시대 인물이며 당시 독일은 프랑스의 침약을 받아 쑥대밭이 되었을 때 목숨의 위협 속에서 괴테는 친 프랑스 작품을 썼다. 강압에 못 이겨 베토벤도 영웅교향곡을 작곡해 바쳤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 국민은 99%의 애국자 이었던 그들을 용서하였고 지금도 독일문화원을 “괴테하우스”로 명명하며 자랑하고 있다. 독일만 그러한가? 영국의 과거 황태자비 다이애나가 죽었을 때 영국 국민은 그녀의 좋은 면만 기억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영정 앞에 장미꽃 한 송이를 바쳤다. 이 대국들의 국민성이 나라를 영광스러운 강대국으로 만드는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산 사람이든 이미 죽은 사람이든 약점만 보이면 들추어내어 1%를 99%보다 많게 만들어 버린다. 동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류는 꿈꾸기 어렵다. 대한민국 초대 연극협회 이사장이며 대한민국예술문화 총연합회를 창설하고 초대이사장을 지냈고 드라마센터라는 예술대학교 전신을 만들어 드라마 촬영 무대공연을 최초로 가르친 장본인이다. 명실 공히 2천5백년 뒤 떨어진 공연드라마문화를 반세기 안에 따라잡은 어느 나라 작가도 흉내 내지 못할 공로를 쌓았다.

동랑 흉상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새끼줄에 목이 묶여 통영시내에 끌려 다녔다는 소문이 흉흉하다. 끝내 참지 못한 친조카 3명(청마의 친자녀)이 통영이 고향이 아니라는 소송까지 벌였던 정말 힘든 사건도 터지게 되었다.

동랑과 청마의 문화자산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문화사적 보고寶庫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1%의 착오는 용서하고 99%의 공로를 높이 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되었으면 정말 자랑스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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