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 김장담그기봉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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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돕기 좌파적 행동, 적자생존 우파적 선택, 상식·합리성·인본주의가 기준돼야

평상시엔 대단히 좌파적인 도시가 선거 때만 되면 무섭도록 우파적으로 변하는 모습은 알다가도 모를 현상이다. 평상시 좌파적인 모습이 본 모습인지, 아니면 선거 때 우파적 모습이 진면목인지.

어느새 11월이다. 매년 11월이면 통영시로부터 올 것이 예견되는 보도 자료가 있다. 각 읍면동마다 펼치는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가 그것.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읍면동이 주도적으로 하기도 하고, 관내 봉사단체나 민간단체가 별도로 벌이기도 한다. 이런 행동에 대해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하는 일 없다. 손가락질은커녕 오히려 박수갈채를 보낸다. 정성들여 담근 김치를 지역공동체의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니, 누가 보더라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자, 나아가 이런 일이라면 더욱 더 장려하고 싶어지는 게 인간본연의 모습.

내년 4월 22대 총선이 있다. 지역을 대표할 제22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중요한 민주절차다. 통영시와 고성군을 대표할 인물로 현재까지는 현역 정점식 국회의원이 유력하다. 무투표 당선까지 예견될 정도다. 그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보수정당이자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이다.

사실 현 지역구 체제가 확정된 1988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수정당 소속이 아닌 후보가 당선된 적이 없다. 정순덕(13대 민정당·14대 민자당)·김동국(15대 신한국당·16대 한나라당)·김명주(17·18대 한나라당)·이군현(18대 한나라당·19·20대 새누리당)·정점식(20대 자유한국당·21대 미래통합당) 등등.

과연 우리는 스스로의 정치사상적 위치·면모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좌파가 무엇인지, 우파가 무엇인지,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고는 있는 것일까? 사실 본심은 좌파를 지향함에도 겉으로는 우파를 지향하는 것 아닌지? 내심은 우파적이면서 겉으로 좌파적 측면을 지향하는 것 아닌지? 본심·내심과 드러나는 면모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알고 보면 좌파적인 사람이 우파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또 그 반대는 아닌지?

사전에「보수」는 “새로운 것을 반대하고 재래의 풍습이나 전통을 중히 여기어 유지하려고 하는 것”으로, 「진보」는 “정도나 수준이 차츰 향상해 가는 것 또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 발전을 추구함”이라 설명한다. 이 설명으로는 마치 ‘보수’는 나빠 보이고, ‘진보’는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극단적인 경우에만 그럴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보수는 현재의 것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하거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약한 것이지, 현재의 것만 무조건 지키려고 하거나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경향이다. 아무리 진보적이어도 공동체 전체가 수용하려면 충분히 시간을 두어야 하는 일임에도 급진적으로 적용하려 한다면 공동체 다수의 저항을 직면하게 될 뿐이다. 역시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보수는 사회지배 권력층·경제적 부유층 등 기득권층이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됐고, 진보는 중산층 이하 시민·사회개혁가·진보운동가·무산계급 등을 주로 대변하게 됐다.

이젠 좌파와 우파를 구별해 보자. 인터넷 사전인 나무위키에는 ‘좌파’를 “사회적 평등을 지지하고 평등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며, 사회적 계층 질서에 반대하는 정치적 스펙트럼으로 우파와 대립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우파’를 “기존의 사회 질서와 계층을 옹호하는 것으로 여기는 정치적 스펙트럼으로, 대체로 자연법, 전통 등에 기반하며, 계층과 불평등을 경쟁에서 비롯된 불가피하거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는 경향”으로 설명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파란 ‘동물적 본성’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도 적용하려는 경향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래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강자가 무리를 이끌어야 하며, 약자에 대한 배려는 가능한 배제하려 한다. 마치 다친 동료 얼룩말을 사자 먹이로 희생시키며 얼룩말 공동체를 지키려는 것과 같다. 강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고, 이 소수가 다수의 약자를 지배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파다.

반면 좌파란 소수 강자의 다수지배를 부정하고, 뒤처지는 약자를 배려해서 함께 공존하려는 경향이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인정하면 만물의 영장과 동물의 차별점이 뭐냐는 주장이며, 다수를 지배하려는 소수의 강자에게도 공동체를 위한 도의(道義)를 요구한다.

우파니, 좌파니 해도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의 성향을 이 두 가지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 ‘경향’으로 나타날 뿐이다. 좌파경향이 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있고, 우파경향이 강한 사람 약한 사람이 있다. 좌파경향이 극단적으로 강한 사람은 ‘극좌’로 무리 지을 수 있고, 우파경향이 극단적으로 강한 사람은 ‘극우’라고 분류할 수 있다. 극단적이게 되면 폭력적일 가능성도 높아진다. 좌파경향이 약한 사람과 우파경향이 약한 사람은 비슷한 경향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 부류를 부정적으로는 ‘회색지대’로, 긍정적으로는 ‘중도’로 표현된다.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게 있다. 좌우·보수·진보 중 어느 쪽에라도 정치적 지지를 보낼 수 있으나, 과연 그 양 지지층을 동일한 무게로 저울질 또는 평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권력·금력을 가진 기득권을 대변하는 일과 무산층·피지배층·사회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일을 동일한 정도로 무게감을 평가하는 것이 타당한가 말이다. 후자가 훨씬 더 어려운 일임은 자명하다.

링컨 미국대통령이 존경받는 것은 노예제도를 폐지했기 때문이며, 인도의 간디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침략자의 압제에 있던 민중들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킹 목사는 존경해도, 말콤X는 결코 존경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역사에서도 ‘민심이 천심’임을 지존(至尊)의 으뜸 왕도로 삼았음은 물론. 현재도 사회적 약자, 소수자, 불우이웃을 돕는 일은 칭찬받고, 장려되는 일이다.

조금만 있으면 연말이웃돕기 성금기탁, 이웃사랑 물품기탁, 사랑의 김장 담그기 봉사가 이어질 것이다. 지난해와 올해 본지에서 보도한 비슷한 뉴스보도를 보자. “OO교회, 독거노인 음식대접”, “△△동, 관내 경로위안행사”, “XX협회, 사랑의 집 고쳐주기 봉사”, “□□복지관, 수리봉사”, “OO동 행정복지센터, 고독사예방용 스마트플러그 설치봉사”, “△△봉사단체, 구치소 격려식품 전달”, “XX동민원기동대, 난방취약계층 방문봉사활동”, “□□병원, 도서지역 방문 의료봉사활동” 등등.

통영시의 지역 공동체는 홀로 사는 노인을 걱정하고, 경제적 약자들을 배려하며, 구치소 수용자들이 공동체로 온전히 되돌아오길 돕는다. 사회적으로 대단히 좌파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정치적으로는 앞서 실례를 든 것처럼 대단히 우파적이다.

이런 부조화, 모순, 불일치, 표리부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식민지배의 기본원칙은 분리지배(devide and rule)다. 조선인 착취에 앞장선 것은 조선인들이었다. 일제부역자 처단을 못했던 실수, 극단적인 좌우대립과 남북분단, 동족상잔 내전과 휴전, 쿠데타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등으로 이어지면서 ‘갈라치기’ 기술이 기득권의 국내정치에까지 활용된 사실까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오랫동안 ‘빨갱이, 좌익분자’, 최근까지 ‘진보좌빨’은 주홍글씨였고, 그렇게 낙인찍히면 국가공동체에서 배제됐으며, 그를 보며 손가락질 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이상한 사람 취급받곤 했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이겨서, 빨갱이의 유혹에 더 이상 흔들릴 일이 없을 법도 한데, 여전히 정치적 반대파를 누명 씌우는 유효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듯하다. 공산주의의 출발점은 좌파와 같았으나,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이, 그 지향점과 도달점은 완전히 달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용어의 정의마저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태반인 것처럼 여겨진다. 가수 겸 배우 A씨는 예전에 “나는 앞뒤가 막혀서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시키기도 어려운 사람을 좌파라고 하는 줄 알았다”고 인터뷰한 적 있고, 연예인 B씨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우파라고 칭하는 줄 알았다”고 한 적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평상시엔 대단히 좌파적인 곳, 정치적으로는 무섭도록 우파적인 곳. 용어적 정의와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 통영만의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좌파든 우파든 상식을 벗어나지 말아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며, 인본주의에 바탕을 둬야 한다. 그래야만 현대 민주시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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