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8월 통제사 신설, 수군절도사 본직에 통제사 겸하던 것을 1607년 마침내 통제사를 본임으로

임진왜란이 7년을 지속했고, 부산포해전과 노량해전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렸음에도, 우리 민족사에서 전략적 차원의 가장 중요한 해전만큼은, 개전 직후 일본의 수륙병진전략을 무력화시킨 한산대첩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그 역사적 승리의 무대가 된 통영 이곳사람들의 자부심은 강하다. 하물며 통영이라는 도시명의 기원이 된 통제영(統制營)에 대한 자부심이랴!

삼도수군통제영, 줄여서 통제영 또는 통영. 그리고 그 수장인 삼도수군통제사, 줄여서 통제사. 초대 통제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이 두룡포 앞바다에 있어 양갈래 수비가 가능하고, 적군의 시야에서는 완전히 숨어있는 천혜의 요새,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한 것에 대한 통영시민들의 자긍심 또한 더 높다.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이건만, 올해 제62회 한산대첩축제의 주제는 굳이 “이순신의 선택, 한산도!”다. 통제사로서, 통제영을 건설할 최적의 요충지로 한산도를 선택했다는 직설화법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류태수 한산대첩문화재단 대표이사에 따르면 여수 진남관에 이렇게 설명돼 있단다. “최초의 통제영이 설치된 곳”이라고. 류태수 대표이사는 “이는 자칫 역사왜곡이 될 수 있으니,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상징적인 주제를 선택한 것.

만일 여수 진남관 측이 정말로 ‘최초의 통제영은 진남관’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 전라좌수영으로써의 역사는 부정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수영을 총괄하는 직책으로, 1593년(선조 26) 8월에 신설된 종2품 무관직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수군절도사(수사)는 정3품 무관당상직으로 절충장군 또는 어모장군의 작위가 주어진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왜란 초기 패퇴하던 조선관군에 희망을 안기는 승전보를 올리며 가선대부, 자헌대부까지 가자(加資)됐다. 가선대부는 종2품, 자헌대부는 정2품 작위에 해당한다. 이순신보다 5살이나 많은 원균으로서는 질투할 만도 한 셈.

그런 질투심을 원균은 숨기지도 않았다. 난중일기에 그 단면들이 나온다.『1593년 2월 23일. 흐리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봤다.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1593년 5월 14일. 영남우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부리니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다.』『1593년 8월 6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정걸도 와서 의논을 하고 있는 동안에 우수사 원균이 하는 말은 걸핏하면 모순된 이야기를 하니 한심한 일이다.』

이는 조정에도 알려졌고, 결국 누가 조선 삼남의 수군을 통합 지휘할지 결정하게 된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겸임시키고 본직은 그대로 두었다. 조정의 의논에서 삼도수사가 서로 통섭할 수 없다고 하여 특별히 통제사를 두어 주관케 하였다. 원균은 선배로서 그의 밑에 있게 됨을 부끄럽게 여겨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수정실록, 1593년(선조 26) 8월 1일>』

실록에도 지적한 것처럼 전라좌수사를 본직으로 하고, 통제사를 겸직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라좌수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아니며, 단지 통제사를 겸임해 업무를 보는 장소인 것이다. 이순신이 통제사에 제수되기 전에는 여수에서 영남바다로 원거리 출정을 했다. 그로 인해 출정마다 남해 인근에서 한번은 숙영을 해야 했다. 장거리 원정을 고민하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군이 왜성을 견고하게 쌓고 있던 가덕도, 거제도, 웅천까지 가까우면서도 아직 왜적의 발길이 닿지 않은 두룡포 일대를 탐색한 끝에 한산도에 진을 설치하는데, 이때가 1593년 6월 21일이다. 이후 8월 26일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진에 당도한다.

그러므로 전라좌수영에 있을 때 이순신은 통제사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장거리 원정의 부담을 덜고, 적정을 더 잘 살피기 위해 한산도에 최전방 진영을 구축했고, 마침 이 시기에 통제사에 제수됨으로써 한산도가 최초의 통제영이 된다.

전쟁이 5년을 지나자 선조는 왜군의 이간계(離間計)에 놀아나면서 이순신을 쫓아내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하는 최악의 수를 택한다.『경(원균)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삼노니, 경은 더욱 책려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1597년(선조 30) 1월 28일>』

원균 통제사는 칠천량에 조선수군 전체를 이끌고 가는 무리수를 두었고, 결국 궤멸 당하고 만다. 전라 앞바다와 육지를 개전 후 처음으로 왜군에게 내주며 한산도 통제영, 전라좌수영까지 불에 타버린다. 기적같은 승리와 함께 조선군은 왜적을 패퇴시킨 이순신 통제사는 마지막 전투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다.

종전 직후 실록기록.『이시언(李時言)을 통제사로 삼았다.<1598년(선조 31) 11월 25일>』이때 이시언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불 탄 진남루 자리에 전라좌수영 객사인 진남관을 건립한다. 이시언은 2년 5개월 뒤 경상우수사에 임명된다.『이시언을 경상우수사로, 배흥립을 전라좌수사로 삼았다.<1601년(선조 34) 5월 3일>』이때부터는 경상우수사가 통제사를 겸했다.『이운룡을 경상도우수사 겸 통제사로 삼았다.<선조 38년(1605) 7월 30일>』

본직의 관작이 낮은 것 때문에 명령계통에서 마찰이 생기는 문제는 종전 후에 극명해 진 듯하다.『비변사가 아뢰기를 “당초 통제사를 처음 설치할 때 한결같이 순변사 아문에 의하였으니 체면이 가볍지 않은데도 처음 설치할 때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수사를 본직으로 삼고 통제사를 겸함하게 하였으므로...(중략) 만약 그렇게 한다면 수사가 순찰 아문의 절제를 받아서 문서를 보내거나 호령을 할 때에 서로 다투게 될 듯합니다. 조정에서 설립한 본의가 어찌 그렇겠습니까? 지금 이후에는 신명하여 통제사를 본임으로, 수사를 겸함으로 삼아서 사체를 높이고 해방의 직임을 중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뜻을 삼도순찰사에게 지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했다.<1607년(선조 40) 5월 6일>』

이렇게 역사적 맥락에서도, 사료적 뒷받침으로도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은 한산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선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통영이, 한산도가, 통제영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한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